정치는 뒤늦게 도착하기도 한다

* 정치는 뒤늦게 도착하기도 한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그렇다. 이를테면 나경원이 이뻐서 그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어떤 이유를 가졌건, 그는 정치적 결과로 수렴되는 행위에 동참했다. 물론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늦게나마 합리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또 어떤 점에서는 '이뻐서'라고 그가 표현한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더 많은 정치적 무의식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그는 더 나아가서 나경원이라는 상징적 인물이 가진 정치적 함의와 맥락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이처럼 '정치'는 공시적 개념화만 가지고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정치는 자칫 공시적인 개념처럼 보이지만 서사 뿐 아니라, 뒤틀리거나 뒤바뀐 서사의 표현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박원순을 서울 시장으로 뽑았다고 해서 그가 박원순의 등장 이전부터 정치와 시민 의식에 대한 맥락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온 사람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박원순을 뽑은 행위가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일일 수는 없다. 정치적 결과로 수렴되는 한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다. 또 반대로 정치적 결과로 수렴되거나 당장 표현되지 못한다고 해서 일관된 정치적 지향이나 실천이, 생각이 정치가 아닌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럼 서울시장에 후보를 내지 못한 진보신당은? 진보신당 당원들은? 나는? 이들은 지금 당장 정치적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도 일관된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거나, 혹은 진성당원들이므로 이들은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정치적 지향이 '이미' 뚜렷했던 이들, 어떤 식으로든 일관된 정치 의식을 가진 이들이 저 '사후적 정치'를 '비정치'나 '탈정치'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어떤 가능성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좌파들과 진보정당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이

모랄에 대하여

* 모랄은 도덕인데, 좀 더 관습적이고, 관성적인 도덕이다. 사실 모랄은 일상 속에서는 그저 '매너'와 '교양'차원에서 일상적으로 존재하기도 하는데....그러나 모랄은 완전히 와해된 세계, 사막화된 곳에서는 인간적 존엄에 대한 최대치의 방어가 되기도 한다. 핵폭탄이 떨어진 땅위에서 아무런 의학적 효과가 없는 진료행위를 계속한다거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연주회, 혹은 이번에 홍세화 아저씨가 진보신당 대표에 출마하면서 낸 출사표 같은 것.

거울, 무대화

* 거울상은 자아를 비추고, 자아의 이미지를 확정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거울상은 자아를 끊임없이 추인하고, 주체는 거울상을 통해 자아를 끊임없이 추인받고자 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무의식적으로, 확정된 거울상이야말로 자아가 무대화-사회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화란 꼭 연극적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큰 타자의 시선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무대화라는 전제 없이 거울상에 집착하는 법은 없다.  그런데 거울상 속의 나는 주체와 다르다. 그 둘을 동일시함으로써 주체는 자신의 존재-주체의 차원을 일정하게 소외시키게 된다. 존재는 무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존재는 속성상 실재에 가깝고, 불안하고, 돌발적이고, 통제불가능하다. 때문에 주이상스는 존재의 차원에서 자아에게 도래하는 어떤 것이겠지....이야기가 샜는데....돌아가서 그렇다면 자신의 거울상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혹은 거울상을 지나치게 불신하는 주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 원인은 해당 주체의 무대화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무대화는 사회화의 차원에서 확정된, 추인된 '자아'를 거울상을 통해 확인받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큰타자에 의해 추인받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 불안, 균열에 사로잡힌 주체에게 무대화는 결격 사유를 추궁받는 장소다. 결국 이와 같은 공포가 주체의 '거울상'을 뒤흔드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가 일관된, 확정된, 추인된 거울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무대화'가 훼손된 주체를 폭로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원래 거울은 고체가 아니라, 점성이 높은 액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거울의 속성은 '무대화'와 '거울상' 사이의 관계가 언제나 일관된 것이 아니라, 갈등과 불안의 관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거의 모든 주체들은 이와 같은 무대화와 거울상 사이의 갈등을 감내하기 마

* 나는 왕을 잃은 왕당파고, 말라버린 로망 위의 Knight, 그게 나의 피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피와 숲에 대해 적대적인 거다. 이를테면 민주주의가 마침내 제비뽑기 형식으로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전까지 내가 왕당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대들과 마찬가지로........왕을 잃은 왕당파에게 왕의 자리는 텅빈 심연이지만, 그래서 영원히 과도적이고, 그래서 숭고하고 나와 그대들의 정치적 히스테리의 동력이다.....

종말론 대심문관

* 안철수, 안철수, 안철수....원래 메시아는 종말론자였다. 사람들을 선택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것이 그의 정치적 지향이었다. 그는 평범한 이들도 스스로를 실존적 결단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던 거다. 토스토옙스키가 대심문관 이야기를 한 것은 이와 같은 종말론을 인간이 감당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결국 선택받은 자들이나 이와 같은 종말론을 감당할 자격이 있다는 거다. 대심문관 이야기에 보면 한 아이의 생명과 공동체 전체의 행/불행을 저울추 위에 놓고 선택하라는, 지극히 센델의 '정의' 비스무레한 이야기가 나온다. 종말론과 메시아와 대심문관과 정의...우리들의 환타지가 겨우 그곳에 머물러 있는 한 뭐..... 내가 안철수를 보고 느끼는 게 뭐냐면.....걍 삥뜯고 싶다는 거다. 후....얼마나 많은 정치꾼들이 나와 같은 유혹을 느끼지 않겠는가!! 우워어어어어~ 근데 만일 그가 삥뜯기지 않을 정도로 강고하다면 그것도 참 우워어어어어~~

나는 임진수 아저씨가 좋네

* 브루스 핑크니 라캉 해설가(?)들을 읽어보면 가끔 라캉의 발언이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는데, 임진수 아저씨는 좀 다르다. 한국말의 스펙트럼이 넓어서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좀 더 헷갈릴 때도 있지만 좀 더 자세하고, 좀 더 세밀할 때가 있다. 그리고 재밌다. 다가오는 겨울은 이 아저씨와 함께.....

속도 미래주의 왕당파 기형도

* 생각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성찰, 저항이라는 것도 일정한 편견이다. 어쩌면 중력은 우리가 가진 생각의 폭주보다 언제나, 더 빠른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의 속도를 인간이 추월하고 있고, 인간의 속도를 자연을 통해 성찰한다는 생각도 환타지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미래주의가 보여주고 있듯이 속도는 때로 인간의 갇힌 상상력을 풀어놓은 중요한 계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자연으로 속도를 성찰한다는 환상은 때로 왕당파적이고, 반동적이다. 꼭 기형도가 그렇다. 머랄까. 기형도의 언어들은 거의 반동적, 아니 전적으로 왕당파적이다. 보수 반동주의자들이 자연을 예찬하고 자연에 대한 싱크로율을 도덕, 윤리로 전환시키는 짓거리는 자연이 가진 속도를 뒤틀기 때문이다. 흠...싸이클을 타다보면 명상의 순간이 오는데, 그건 최소한 40키로 이상으로 폐달을 밟아야 가능하다.

꿈에 벌레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1988.11) - 기형도 - 나의 아버지 , 하실 수만 있으시면 ,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 그 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 겟세마네의 기도; 마태복음서26:31-46 꿈에 벌레가 나왔다 내 몸에 개미가 나왔다 꿈에서 깨었다 글쎄, 나는 아버지는 없지만 잔이 가득차기를 기다린다. 나는 느낄 수 있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