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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 요즘 이연주의 시집을 매일 매일 갉아먹고 있다. 새벽 두시. 나는 노오란 핸드 랜턴 불빛에 의지해서 이연주를 읽어 내려간다. 위악이라고? 실천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시도를 그렇게 부르는 건 '이미지'가 작동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미지는 작동하잖아? 어떻게? 단절을 매개로! 못박음을 시작으로!! 매음녀의 이미지는 히스테리증자가 시도하는 인식론적 단절의 시도다. 매음녀의 이미지를 불러내는 주체는 히스테리적 망치질을 시도하는 것이다.  히스테리 주체는 기본적으로 타자의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 실패한, 그래서 타자의 질서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주체다. 그래서 그는 그 의심에 사로잡히기 전에 더 강력한 타자의 질서를 요청한다. 그는 타자의 욕망을 강화하고, 그 스스로 그 욕망에 합당한 대상이 됨으로써 이를 추인받고자 하는 주체다. 매음녀의 이미지는 이와 같은 히스테리 주체의 구조와 닮아 있다. 그러나 히스테리 주체는 매음녀의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를 불러내지만, 실천의 영역까지는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돈으로 교환되는 매음녀는 결정적으로 '교환불가능성'이라는 히스테리 주체의 존재론적 질문, 그 강박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히스테리 주체의 탄생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존재가 주체에게 묻는 '교환가능/ 불가능'의 질문의 반복과 강박일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많은 질서들이 '자본주의 전략'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히스테리 주체는 상징적 차원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일 수도, 또 가장 非자본주의적인 예외적 존재일 수도 있는 주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