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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논픽션은 그 현장성 때문에, 더 자유롭다. 논픽션은 좀 더 감상적이 되어도 리얼하고, 좀 더 선동적이 되어도 리얼하다. 논픽션은 감상성이 리얼리즘을 좀먹지 않는 장르다. 현장은 우리가 리얼리스틱하다고 말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리얼하기 때문이다. 논픽션은 탐욕적으로 세밀할 필요가 없다. 논픽션은 스냅샷처럼 우발성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21에서 진행되었던 노동 OTL 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4천원 인생이라는 책인데, 마트에서, 식당 아줌마들과, 이주 노동자의 옆에서 함께 먹고 자며 태어난 현장 보고들이다. 물론, 체험 삶의 현장처럼 머 땀의 소중함을....어쩌구 이런 내용은 아니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의 현장이다. 고은의 만인보 따위는 이 논픽션에 비하면, 리얼리스틱-엔터테인먼트...    

숭고 II

* 어머니는 남근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다, 어미니에게 남근은 없다, 아버지가 남근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다, 아버지는 남근을 결여하고 있다. 남근은 미끄러져 나가면서, 기표의 연쇄를 만든다. 때문에 남근은 언제나 결여된 존재다. 그것은 상징을 만들어내는 텅 빈 무엇이다. 그것은 결코 신체/주체로 귀속되지 않는 문장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한다고 적는다...    문장은 그 문장이 최종적으로 귀속되는 주체를 감출 때에만 완결된다. 영원히 미끄러지는 주체, 탈주하는 주체를 불러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문장의 중간을 잘라내고, 못박고, 주체의 흔적을 잠시 거머쥔다. 나는 남근이다, 나는 남근이 아니다, 나는 남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나는 남근을 가지고 싶다, 너는 가질 수 없다, 내가 네 아버지다. 이 금지를 통하지 않고는 너는 남근을 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상징에 몸담을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잠시마나, 네 주체의 미끄러짐을 멈추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상징 질서들이다.   * 다시 말해보자. 생략된 것들이 있다. 나는 어머니의 남근이다. 아니다. 나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고 싶다... 내가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내가 남근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불가능성을 통해 도달한 곳이다. 나는 남근이 되고 싶다. 불가능하다. 나는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    그런데, 숭고는 내가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 가 아니라, 내가 남근이 되고 싶다, 의 욕망이 불러낸 어떤 것이다. 숭고의 영역에서 아버지는 남근을 소유하거나, 결여한 자가 아니라, 남근 그 자체이다. 아니, 나는 아버지가 남근 그 자체이기를 원한다. 때문에 아버지 기표가 대표하는 타자성이 유실된다. 숭고는 타자의 자기 동일성을 유실시킨다. 타자의 타자됨, 즉 타자성은 나,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타자에게로 떠넘겨진다. 주체가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영원히 탈주한다. 아버지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