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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보고 있으면

* 강산에 노래.   * 서울역에 노숙자가 있다고 하자. 구원은 그를 삶의 결단으로 이끄는 일이지만, 연대는 노숙자에게도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그가 노숙자가 되기까지 더 많은 안전망이 작동하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그 노숙자의 인격이나 믿음과 상관없이 말이다    단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모든 이들과 연대하는 것보다 덜 가치 있거나, 더 손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머 말도 안되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연대하거나, 아니면 단 한 사람만을 구원할 수 있거나...이 두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두를 구원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예수는 묵시문학의 비유를 통해 각 개별자들을 실존적 결단으로 이끌려고 했다. 모두를 대속해 십자가에 매달린 일은 그의 의지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나는 단 한 사람의 구원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에 값한다고 생각한다.    시몬느 베이유는 옷을 참 못입었는데, 보봐르가 베이유를 만난 자리에서 참 옷을 못입는다고 그랬다고 한다. 보봐르의 인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베이유는 그 글이든, 인생이든 참으로 성스러운 삶을 살다가 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는 반동이었다. 파스칼이 그랬고, 우치무라 간조가 그랬다. 보봐르의 인격이 훌륭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베이유보다 진보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민중신학의 쇠퇴는 단순히 남한 교회의 부패 때문만은 아니다. 연대에 대한 신념과 구원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을까, 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이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