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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 기형도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기형도의 시는 반동적이다, 감상적이다. 그런데 그 감상주의라는 레떼르를 손쉽게 붙이기에는 무엇인가, 더 해명해야 할 것이 있다. 우발성. 불행해서 고통스러운...손쉬운 인과관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우발성, 죽을 목숨들이 가지는 우발성, 인과를 벗어나 우발성을 통해 환기되는 주체를 불러내고, 인과와 보편으로부터 내쳐진, 그러나 도드라진 주체, 돌발하는 주체를 드러낸다. 그의 시에는 임박한 주체의 탄생, 혹은 주체의 자각이 선명하게 묘사된다. 또, 숨어버리게 될 운명을 가진 주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