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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고유명사, 시, 위치 없음, 좌표

* 구태의연하게도 사랑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고유명사는 타자가 가진 차이로써의 고유성을 완전히 승인하는 일이며, 기능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타자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름은 때문에, 어이없게도 차이로써의 나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내가 호명하는, 사랑하는 상대방의 이름은 그 우주를 그 우주로써 승인하는 일이다. 내 존재는 그 동일성을 확인해줌으로써 현존을 획득한다. 타자가 오직 그 자신이라는 동일성을 확정하는 일은 타자가 존재하는 그 가능성의 우주를 순간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며, '차이'조차 허락될 수 없는 나를...불가능으로 상정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사랑의 존재 방식은, 시의 존재 이유와 비슷하다. 시의 언어는 결국 궁극적으로 모조리 고유명사일 수밖에 없다. 시가 죽은 말을 되살리는 방식은, 그가 존재하는 우주를 되살려, 그 말을 완전히 호환불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시는 말이 가지는 상징성, 질서, 그 전체로써의 우주를 불러낸다. 시는 그 호환불가능성, 즉 기능성을 완전히 넘어서는 포괄적 가능성을 되살리려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을 가진다. 시에 있어서 은유는 바로, 그 기능성을 깨부수려는 과정이다.    고유명사와 기능적 언어 사이에 좌표가 존재한다. 좌표는 고유명사도 아니며, 또한 기능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좌표는 위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질량 없는, 현존하지 않는 어떤 것을 불러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무와 존재 사이의 '0'이다. 그것은 불안의 기표다. 사랑의 대상인 타자, 그 타자를 불러내는 고유명사가 내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내가 좌표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완전한 차이를 통해 타자를 불러내고, 타자의 오직, 그 자신만의 우주를, 고유명사를 통해 불러냄과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를 부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좌표로 존재하는 나는 내가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자기 동일성을 의심함으로써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