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 2010의 게시물 표시

예술, 독창성에 대한 편견

* 예술이 독창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이 예술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건 반만 맞는 명제다. 역사상 어떤 예술도 오로지 독창적이기 때문에 예술인 경우는 없었다. 예술은 언제나 인정투쟁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에 더 가까웠다. 예술적 독창성이란 언제나 승인된 독창성, 공유되거나 합의된 독창성이었다. 글쓰기의 함정은 바로 여기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거나, 글이 '안나오는' 벽에 부딪쳤을 때, 독창적인 아이디어, 예술적 영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오해다. 독창성에 함몰된 예술의 자기 정의는 내 식으로 이야기하면 금태환제 시대의 이야기다. 내 농담을 더 진전시키면 최근 들어 이처럼 먼 옛날의 담론이 다시 회귀하는 이유는 저성장, 고실업 시대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인즈가 저성장, 고실업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신고전파 이전 노동가치론의 전제를 빌려오는 행위와 비슷한 패턴이다. 하하하. 예술의 독창성이 강조되고, 창궐하는 것은 부르조아 예술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사실, 예술의 독창성은 더 과학적으로 말하면 호환불가능성이다. 그런데, 이 호환불가능성은 예술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블로그 포스팅의 댓글들은 포스팅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지만, 포스팅의 의미를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댓글이 더 많이 달리면 달릴수록 해당 포스트는 더 많은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한다. 포스팅은 복사할 수 있지만, 그 반응까지 재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뭐 대충 그렇게 생각하면, 예술의 호환불가능성은 바로 그와 같은 피드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현은 '길항'이라는 개념이 문학 작품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 봤지만, '길항'은 현상으로써 작품, 문학이라는 사건 자체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하루키나, 대중 문학에 대한 남조선 문단의 배타적인 태도와 한편으로 순문학에 대한 상업적인 비평들은 바로 이 '길항'이 문학에 내재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