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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증자의 사랑, 사랑받음 / 진실

*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대상에게 가 의미있는 '체험'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만일 그 대상이, 그 타자가 히스테리증자라면? 히스테리증자의 입장에서 사랑받는 일이란 '알 수 없지만 체험되는 어떤 것' 이다. 그러나 히스테리증자에게 '체험'이란 기본적으로 외상적인 것이고, '앎'을 지연시키는 어떤 것이다. 히스테리증자에게 '체험'은 전체를 조망하는 '앎'의 외연을 자꾸만 확대시키기를 요구하는 어떤 것이며, 차라리 '예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무엇이다.    언어가 선재적이라면, 사랑은 선험적이다. 사랑은 '앎'을 통하지 않고도, 체험으로 곧바로 수렴된다. 히스테리증자에게 이 같은 사랑의 직접성은 '앎'의 무기력을 폭로하는 위협으로 작동한다. 사랑의 선험성은 언어의 선재성을 위협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에게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확인시키는 존재다.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타자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 사랑은 히스테리증자가 스스로를 '앎'의 일부로 귀속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때문에 히스테리증자는 사랑을 받아들일 때, 이유를 원한다. 이유가 사랑을 근거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가 사랑을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선험성은 언제나, 히스테리증자의 이와 같은 기획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킨다. 히스테리증자가 사랑에 노출된다는 것은, 불안과 위협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 똥은 언어화도 되지 않고, 외상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똥을 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