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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안티조선 운동사 리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유물론자가   그러나 유물론자가 가지는 '선재성'에 대해서 나는 아랫글과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의식에 대한 현실의 선재성을 공공성과 당파성의 관계에 대입하기 전에, 당파성 그 자체에 대해 말해보자. 당파성은 결국 '의식'보다 먼저 존재하는 '계급 갈등' 혹은 '계급 문제'의 선재성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공공성'이라고 호명하는 어떤 것이 공동체적인 가치 이전에 '공리주의'적인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당파성은 계급적 자기 정체성 이전에 계급 이해의 문제다. 그렇다면, 공공성은 당파성의 선재적 조건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당파적 이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공성을 끊임없이 '가치' 혹은 '공정성'으로 호명하면 할수록 나는 그것이 '공리주의'적 지향을 은폐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손쉽게 공리주의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계량화가 불가능한 인간을, '평균'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호명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는 배제의 논리를 기반으로 한 프로크루스테스식의 합리화를 '인간 일반'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때문에 나는 공공성은 당파성 이전에 존재하는 선재적 조건이라거나 혹은 당파적 이해를 떠난 게임의 룰, 윤리라는 생각에 저항하고자 한다. 공공성은 아무리 양보해도 적대적 당파성이 갈등하는 장소이며, 모든 당파적 이해가 잠시 멈추는 지점이 아니라, 모든 당파적 이해가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왜? 공공성이 배제의 논리를 통해 형성되는 과정에서 편입을 위한 경쟁과 이해의 충돌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공성이 좌초되는 지점은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아니라, 차이가 배제, 혹은 무화되거나 차이가 '일반화'되는 지점이라고 해야 맞다.  특히 저 차이의 '일반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