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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

* 그런데, 어떤 생태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의 생태계가 가진 배타성을 그대로 두고, 그 배타성에 개입하기보다 자신의 순환성을 완성하면 자본주의도 저절로 변화하리라고 믿는 것이다. 생태주의랑은 상관없지만 먼 옛날 이 은하계에는 마르틴 부버라는 분이 살고 계셨는데, 암튼 이분이 생각한 유토피아 사회주의, 즉 사회주의적 이상은 완전 조합주의였다. 그는 생산과 소비를 모두 조합의 연대를 통해 해결하면 시장이 필요없거나, 혹은 시장과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물론, 나의 알튀세르는 사회주의 따위 상품 관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건널목이며, 더 나아가 똥이라고 그러셨지만, 암튼 부버 아저씨는 자신의 완전 조합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이스라엘에서도 발견하셨는데, 공동 농장 같은 모델이 그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면...머 극우파들이 제공하는 국가적 배려에 안주하게 되었다는 거다. 물론, 머 말이야 머 반대 의견을 내셨지만....부버의 '나와 너'는 그의 정치적 이상과 함께 고려할 때 완전히 자족적이고, 예외를 갖기 않는 순환-폐쇄형의 이론적 유토피아상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조합주의나 생태주의가 자본주의적 배타성에 대해 함구하는 순간부터, 혹은 개입하기를 그만두는 순간부터 이와 같은 운동들은 그야말로 '유토피아'이외에 다른 현실적, 대안적 기능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거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죽음과 같은 엄연한 타자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라는 타자를 제외하고 설정한 질서와 구조들은 그래서 또 언제나 자기-폐쇄적인 가치 구조라는 비판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닐까. * 맨날 영성 좌파라 그러는데, 사실 김규항 같은 영성 좌파의 등장은 구멍난 공공성을 우파가 아닌, 좌파들이 메울 수 밖에 없었던 딜레마가 좌파 그 스스로에게로 옮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파성으로 풀이하면 공공성은 아무리 아무리 양보해도 우파적 헤게모니가 가장 정상적으로 작동하는(해야 할)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