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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신성함, 밥벌이의 환멸

* 밥벌이는 치욕적이다. 밥벌이는 그러나 신성하다. 치욕적이지만, 밥벌이를 통해 생을 영위한다는 사실 자체는 엄연하고, 엄숙하다. 김훈의, 때로는 이성복의 논리들이다. 저 밥벌이의 신성함과 환멸의 이분법이 밥벌이의 정치적 함의를 휘발시킨다. 밥벌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통용되고, 밥벌이라고 하면 무슨 일이든지 폄훼된다. 밥벌이를 위해서라면, 학살자의 용비어천가를 써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도 조금은 관대하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밥벌이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는 일, 밥벌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해내는 일은 밥도 벌고, 명분도 얻으려는 순수하지 못한 행위가 된다. 밥벌이는 쾌락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부르조아들은 밥벌이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밥벌이가 아니라 쾌락원칙에 충실한 행동일 뿐이다. 그것을 재테크라고 부르고, 게임 이론으로 설명해내고자 하는 우파들의 논리를 밥벌이의 지옥에서 사는 이들이 앵무새처럼 따른다. 부르조아는 자기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 곧 경제 활동이 된다. 밥벌이의 엄연함, 밥벌이의 치욕에서 벗어나려면 부르조아가 되는 길 밖에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밥벌이 성찰하는 이들은 없다. 어디까지나, 자아 이상에 가까운 부르조아의 자리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밥벌이를 들여다본다.    밥벌이라는 치욕과 신성, 이 이분법을 부수어야 한다. 노동은 자가발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자주 잊어버린다. 자수성가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밥벌이의 치욕과 환멸의 이분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람들이 대개 소위 자수성가했다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은 자수성가라는 허구를 통해 노동의 교환관계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자수성가했다고 믿는 이들이야말로, 밥벌이의 치욕과 환멸, 밥벌이의 탈정치성을 앞서서 전파하는 전도사들인 이유가 여기 있다.   .....................부르조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