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이 좋다, 숲이 좋다, 그런 이야기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숲도 좋고, 나무도, 풀도, 꽃도 좋다. 그런데, 우리가 숲을 좋아하는 이유가 숲과 나무가 측정할 수 없는 신비를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사실에는 반대한다. 내가 겪은 숲, 내가 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발성이 그곳을 지배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숲에서 우발성에 대해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발적이고, 가시적인 현상은 구름이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안 구름은 그야말로 원형을 가지지 않는 '현상' 그 자체다. 나는 '나'라는 우발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를 원한다. 대부분의 '나'는 일종의 기시감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발견이지만 구름이야말로 그 발견의 바깥을 보여준다.....'나'라는 관성은 원형을 가졌다는 환상이 없다면 그져 일종의 접촉점에 지나지 않는다. 구름은 흩어지는 동안에도, 다시 모여 구성되는 동안에도 구름으로 호명된다. 감각적 실존의 차원은 우발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건 그거구. 나는 알고 보면 감정이 잘 일어나지 않는 타입이다. 냉정한 건 아닌데, 감정의 계기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사실 감정이라는 건 일정한 계기 그 자체가 불러오는 게 아니라, 그 계기들이 어떤 저항을 통과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한테는 그 저항이 없다. '나'라는 기시감 같은 게 잘 없는 거다. 그런데, '나'의 구성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즉 그 기시감의 정체는 타인들이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으므로....근데, 이 기사감을 깨뜨리는 존재가 나타나면 '나'는 비로소 저항을 통과하는 것이다.
* 이택광 아저씨로부터 촉발된(?) 라캉주의 논쟁(?)을 보고 있자니 이건 뭐...지나치게 한심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논쟁 주위로 모여드는 수많은 이상한 사람들의 논란보
* 정치는 뒤늦게 도착하기도 한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그렇다. 이를테면 나경원이 이뻐서 그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어떤 이유를 가졌건, 그는 정치적 결과로 수렴되는 행위에 동참했다. 물론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늦게나마 합리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또 어떤 점에서는 '이뻐서'라고 그가 표현한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더 많은 정치적 무의식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그는 더 나아가서 나경원이라는 상징적 인물이 가진 정치적 함의와 맥락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이처럼 '정치'는 공시적 개념화만 가지고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정치는 자칫 공시적인 개념처럼 보이지만 서사 뿐 아니라, 뒤틀리거나 뒤바뀐 서사의 표현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박원순을 서울 시장으로 뽑았다고 해서 그가 박원순의 등장 이전부터 정치와 시민 의식에 대한 맥락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온 사람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박원순을 뽑은 행위가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일일 수는 없다. 정치적 결과로 수렴되는 한 모든 행위는 정치적이다. 또 반대로 정치적 결과로 수렴되거나 당장 표현되지 못한다고 해서 일관된 정치적 지향이나 실천이, 생각이 정치가 아닌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럼 서울시장에 후보를 내지 못한 진보신당은? 진보신당 당원들은? 나는? 이들은 지금 당장 정치적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도 일관된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거나, 혹은 진성당원들이므로 이들은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정치적 지향이 '이미' 뚜렷했던 이들, 어떤 식으로든 일관된 정치 의식을 가진 이들이 저 '사후적 정치'를 '비정치'나 '탈정치'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어떤 가능성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좌파들과 진보정당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이
tag heuer! call?
답글삭제음...call... ㅠㅠ
답글삭제oh! sorry..b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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