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풋볼

* 레알이랑 바르샤랑 축구를 하는데, 이건.... 뭐 흔히 레알의 축구를 안티풋볼이라고 한다. 그 화려한 라인업으로 맨날 안티풋볼을 하는 건 아니고, 바르샤에 대항할 때만 그렇다. 아무튼 축구를 잘 하자고 경쟁하면, 맨날 바르샤한테 깨지니까, 차라리 축구가 작동되지 않게 하자는 거다. 몸싸움과 수비 집중, 미드필드 라인을 후퇴시켜서 공격의 최전방이 아닌, 수비의 최전방으로 삼는 축구. 머 대략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아부지 때문인데, 아마도 내가 본 선거 가운데 아마도 아부지가 (이렇게 격렬하게)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서다.  여기에는 길고 긴 스토리가 있는 것인데...... 먼 옛날 1.4 후퇴 때 쫓겨 내려온 아버지에게 정치란 생명을 담보한 전쟁의 연장선상이랄까. 김동춘 아저씨가 전쟁과 사회 서문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는 진술을 빌려왔지만, 결국 책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비롯된 외상적 강박에 좌우되는 정치를 해명(?)해 주었듯이, 아버지 세대의 정치 역시 언제든지 폭력과 전쟁, 더 좁게는 갈등으로 전환될 수 있는 정치적 뇌관을 제거하는 데 바쳐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이들이 의존하는, 정치는 화해의 장이라는 무기력해 보이는 수사는, 실은 아주 강박적이고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언술인 셈이다.  안티풋볼이 프로 축구의 존재 이유 자체를 위협하면서까지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내 아버지의 정치관은 근본적으로 '반정치'의 형태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아니, 더 극단적으로 '반정치'일 때만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아버지에게 반한나라당이라는 구호는 저항적이라기보다, '반정치적'인 무엇일 것이다. 이건 민주 대 반민주, 머 이런 구분과도 또 다른 것일텐데.....

생태계

* 그런데, 어떤 생태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의 생태계가 가진 배타성을 그대로 두고, 그 배타성에 개입하기보다 자신의 순환성을 완성하면 자본주의도 저절로 변화하리라고 믿는 것이다. 생태주의랑은 상관없지만 먼 옛날 이 은하계에는 마르틴 부버라는 분이 살고 계셨는데, 암튼 이분이 생각한 유토피아 사회주의, 즉 사회주의적 이상은 완전 조합주의였다. 그는 생산과 소비를 모두 조합의 연대를 통해 해결하면 시장이 필요없거나, 혹은 시장과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물론, 나의 알튀세르는 사회주의 따위 상품 관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건널목이며, 더 나아가 똥이라고 그러셨지만, 암튼 부버 아저씨는 자신의 완전 조합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이스라엘에서도 발견하셨는데, 공동 농장 같은 모델이 그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면...머 극우파들이 제공하는 국가적 배려에 안주하게 되었다는 거다. 물론, 머 말이야 머 반대 의견을 내셨지만....부버의 '나와 너'는 그의 정치적 이상과 함께 고려할 때 완전히 자족적이고, 예외를 갖기 않는 순환-폐쇄형의 이론적 유토피아상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조합주의나 생태주의가 자본주의적 배타성에 대해 함구하는 순간부터, 혹은 개입하기를 그만두는 순간부터 이와 같은 운동들은 그야말로 '유토피아'이외에 다른 현실적, 대안적 기능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거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죽음과 같은 엄연한 타자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라는 타자를 제외하고 설정한 질서와 구조들은 그래서 또 언제나 자기-폐쇄적인 가치 구조라는 비판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닐까. * 맨날 영성 좌파라 그러는데, 사실 김규항 같은 영성 좌파의 등장은 구멍난 공공성을 우파가 아닌, 좌파들이 메울 수 밖에 없었던 딜레마가 좌파 그 스스로에게로 옮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파성으로 풀이하면 공공성은 아무리 아무리 양보해도 우파적 헤게모니가 가장 정상적으로 작동하는(해야 할) 영역...

이 놈의 알튀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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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튀세르를 독파? 돌파하기로 마음 먹고 세번째 집어든 놈이 이 책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였는데....아주 진도가 안나간다. 자서전이고 어려운 점도 없고 그런데도 아주 진도가 안나간다. 한 달이 넘었는데 반도 못읽었다. 중간 중간에 다른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책만 읽고 있는데도 그렇다....자전거를 질렀다. * 내일은 빠리에 사는 나의 사촌이 귀국해서 결혼을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빠리에서 공부하는 어떤 분이라고 한다. 사실 뭐 나랑은 별 상관은 없다. 다만.....자전거를 질렀다. * 자전거를 이딸리아에서 구입했는데, 심지어 그분이 그걸 인천공항에 들고 오셨다. 이번 주가 부활절 주간이라서 배송 업체들이 다 논다고 판매하시는 아저씨가 국내에 들어오는 길에 들고 오셨다. 나에게 미친듯이 자전거 뽐뿌질을 한, 망원역 사는 친구가 그걸 받아가지고 왔다. 음...그래서 나는 오늘 알튀세르 자서전을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읽을거라는 이야기. * 나의 토마지니는 이렇다.

계급의식이라는 환상

* 당파성은 계급 이해에 기반한 호명이다. 그 호명을 통해 당파성에 입각한 주체가 태어나는 것이고, 주체는 자기가 소속된 그 호명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이겠지.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계급 이해가 당파성을 가진 주체를 모조리 해명할 수는 없다. 당파성 자체가 수많은 호명으로 구성된 복잡성과 호명을 넘어서는 과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계급 이해와 당파성 간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다시 유물론자는 이와 같은 간극을 좁히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지향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될 것이고, 이것이 정치적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꼬뮤니스트는 계급이해의 해명과 계급투쟁의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코뮌을 지향하는 사람이지, 계급의식의 동어반복과 자기 확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좀 더 의미를 확장하면 꼬뮤니스트라는 거울상에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코뮌이 복무하고 지향하는 가치와 미래상이 다른 공동체적 이상과 어떻게 다른지를 확정하는 일이 꼬뮤니스트를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유물론은 이와같은 특정한 공동체적 이상이 그것의 물질적 기반과 지금 얼마나 가까운지를 해명해야 하고, 그것의 격차를 줄이는 일일 것이다.  계급의식이 계급이해로부터 점점 더 괴리되어 마침내 독립적인 자기 규정의 문제에만 한정시키는 것이야말로 계급 의식을 나르시시즘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유나바머 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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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니까 나는 가끔 내가 유나바머가 되어서 건물을 폭파시키는 몽상을 하는데, 음...이를테면 조선일보사를 폭파시키면 어떻게 될까? 그럼 아마도 극우파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나라 진보 공동체들을 모조리 다 조질 것이다... 머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럼 도대체 뭘 전략적으로 폭파시켜야 이와 같은 사태를 피할 수 있을까...피할 수 없겠지? 그, 그럼 한겨레신문사나 경향신문사를 폭파시켜야 하나?? 아니, 근데 나는 아직도 정태춘의 노래가 좋다...나의 미스테리 가운데 하나....

노출증

* 거울아, 거울아, 동화 속에서 마녀는 거울에게 묻는다. 그러나 백설공주는 거울을 가지지 않는데, 사회적으로 승인된 자아상이란 이처럼 거울을 내면화하거나 은폐한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일관된 거울상을 지닌 이들은 더 이상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일관된 거울상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승인된 자아 이상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자아,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거울상을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자아는 확고한, 승인된 자아 이상을 획득하지 못한 주체의 증거라고 하겠다. 한 마디로 마녀가 거울에게 물어보는 행위는 마녀가 사회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자신의 자아를 벌충하고자 하는 강박 때문이다.  그런데, 거울은 이처럼 확정되지 못한 자아를 확인해주는 기능과 동시에 다시 거울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의 자아를 유예시켜 주기도 한다. 즉 다시 거울 앞에 설 때까지 나는 지금의 불확정적이고, 승인되지 못한 나를 처벌하지 않고 유예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노출증이 반복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자기 처벌을 유예시키는 쾌락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외설적이고 노골적이고 비인간적인 어떤 것을 솔직한 것으로, 내면에 성실한 것으로 호명해오고 있는데, 이 같은 사회적 노출증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망가지거나, 깨진 자기 정체성을 유예시킴으로써 확인을 거부하고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차라리 불안을 살아내는 것이 더 낫다고.

생명선? 아니 생활가능선..

* 그러니까 전두엽을 다친 이후에 나는 죽어도 일곱시간은 넘게 자야 다음날 정상적인, 두통이나 무기력증이 없는 생활이 가능하다. 나의 신경외과 선생님은 전공이 머 아이들인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컴퓨터를 통해 얻는 정보의 99%를 정보가 아니라, 그냥 쓰레기로 취급한다고 한다. 뇌는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통해서 얻은 정보를 처리할 때 사고 회로가 움직이기보다, 그저 기계적 반사 회로가 반응을 보일 뿐이라는 거다. 특히 게임 중에는 이 같은 현상이 극대화 되어서 이건 뭐 그냥 반사 회로만 미친듯이 돌아간다나....  아마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주로 치료하다 보니 그렇겠지만, 아무튼 뭐 전문가의 말이니 새겨들어야겠다, 생각은 하지만 그의 저 완강한 태도 때문에 나의 스타크래프트에 대해서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아무튼 일곱시간 이상 잠을 자면, 나는 좀 공격적인 인간이 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컨디션이 좋을수록 반사회적이야. 흠...경험적 사실인데 나는야 반사회적일 때 일도 잘 하는 것 같다. 흠냐..좀 이상한 인과론이긴 한데 그렇다.

그댄 왠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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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댄 왠지 달라요.

비가 내린다

* 그저께 밤에 목감기 때문에 목이 칼칼하다, 바짝 마른다는 기분으로 잠들어 있었는데, 잠 자고 있는 중간에 비가 내리는 거다. 비가 내리면서 집안의 공기가 일순 부드러워지고, 잠자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더랬다.

4월 5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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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5일은 커트 코베인이 죽은 날이다. 내 십대 후반의 백그라운드 뮤직 같은 너바나. 학교도 안가고 텅 빈 거실에서 LP를 걸어놓고 너바나로 공기를 박박 긁는 날들이 많았다. 이제는 머 무슨 티브이 광고 음악 같은 걸로도 나오지만...으으으...가끔씩 아직도 그의 음악을 찾아서 듣는다. 음, 내가 그를 딱 한번 안좋아했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지같은 언플러그드 열풍에 합류해 언플러그드로 콘서트를 열어 가지구, 엠티뷔가 폭발하던 때였다. 난 그때 나의 커트 코베인마져 병신같은 언플러그드 어쩌구에 한 발 담그는 걸 보고 막 화가 났더랬다. 병신같은 언플러그드! 병신같은 언플러그드!! 그치만, 세월이 한참 지나서 그 공연을 다시 찾아서 듣고 있다. All Apologirs ......봄이다...

M.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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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만화 터치에 갑자원 진출을 위한 지역 결승전 날짜가 '1986년 7월 30일'로 나온다. 만화를 보다가 그해 우리나라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뒤적거려보니 음....묘하다. * MOT 2집에 나오는 시니피에, 라는 노래다. 글쎄, 내 고통만큼 너도 고통스러웠으면 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노동가치론에서 한계효용으로 ㅋ

* 작업 할때 내가 안전모를 쓰는 이유는, 떨어져 내리는 자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곤두박칠 치게될 내 머리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강박적으로 올라가는 건물들과 공정을, 날뛰는 내 머릿속의 상상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나는 쉽게 진정되지 않는 혼돈이고, 안전모는 건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혼돈 위에 덮어 놓은 뚜껑이다. 그러므로, 내가 매일 받아가는 수당은 그 뚜껑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한 것이지, 내 노동의 댓가가 아니다. 그 뚜껑의 비용은 기업,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사회적 비용과 내 팔다리를 혼돈으로부터 분리해내 예측가능한 공정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도구적 합리의 댓가를 합한 것이다.    노동의 댓가라든가, 교환 가치라는 환상은 이와 같은 합리, 윤리의 이름이다. 글쎄, 나는 합리의 가장 극단적인 현상이 윤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윤리는 또 본질적으로 강박적이다. 합리는 왜 자신의 누빔점을 은폐하는 데 몰두하게 될까? 저 안전모와 같은 누빔점들이야말로, 합리라는 환상의 출발점이고, 풍요로운 서식지다. * 사랑을 폭력으로부터 더 이상 구별해낼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사랑과 폭력의 경계를 무너뜨릴 때까지 전진한다. 무엇이든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는, 무지막지한 순간이 나를 덮친다. 사랑은 국경도, 인종도, 경계도 없다는 말은 실은 이렇게나 잔인한 사랑의 본질을 담고 있다. 폭력으로 전이되는 혁명이 그러하다. '아이엠러브'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 폭력은 종말론적 결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음악을 왼쪽에 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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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왼쪽에 두기로 했다. 왼쪽에 있는 음악. 집에 부모님이 올라오셨는데, 어머니가 나보고 잘 생겼다고 했다. 아버지는 점점 더 여자 노인처럼 변해간다고 할까. 3일 동안 씼지 않고 있다가 씼었더니, 그야말로 발가벗은 느낌이랄까. 날씨가 너무 따뜻하다. 이태원에 과일을 사러 갔다. 오이를 사러 갔는데, 살 수가 없었다. 이태원에는 오이를 팔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셔츠를 두 개 맞췄다. 화요일날 찾으러 갈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알튀세르를 읽는데, 글쎄 그는 여자 사람을 증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또 그것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더 나아가 여자 사람들이야말로 남자 사람이 존재로써 불가피하게 갖고 있는 '결핍'을 목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게다가 연민도 없이. 연민도 없이. 

여전히 안티조선 운동사 리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유물론자가   그러나 유물론자가 가지는 '선재성'에 대해서 나는 아랫글과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의식에 대한 현실의 선재성을 공공성과 당파성의 관계에 대입하기 전에, 당파성 그 자체에 대해 말해보자. 당파성은 결국 '의식'보다 먼저 존재하는 '계급 갈등' 혹은 '계급 문제'의 선재성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공공성'이라고 호명하는 어떤 것이 공동체적인 가치 이전에 '공리주의'적인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당파성은 계급적 자기 정체성 이전에 계급 이해의 문제다. 그렇다면, 공공성은 당파성의 선재적 조건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당파적 이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공성을 끊임없이 '가치' 혹은 '공정성'으로 호명하면 할수록 나는 그것이 '공리주의'적 지향을 은폐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손쉽게 공리주의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계량화가 불가능한 인간을, '평균'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호명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는 배제의 논리를 기반으로 한 프로크루스테스식의 합리화를 '인간 일반'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때문에 나는 공공성은 당파성 이전에 존재하는 선재적 조건이라거나 혹은 당파적 이해를 떠난 게임의 룰, 윤리라는 생각에 저항하고자 한다. 공공성은 아무리 양보해도 적대적 당파성이 갈등하는 장소이며, 모든 당파적 이해가 잠시 멈추는 지점이 아니라, 모든 당파적 이해가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왜? 공공성이 배제의 논리를 통해 형성되는 과정에서 편입을 위한 경쟁과 이해의 충돌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공성이 좌초되는 지점은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아니라, 차이가 배제, 혹은 무화되거나 차이가 '일반화'되는 지점이라고 해야 맞다.  특히 저 차이의 '일반화'...

안티조선 운동사 리뷰라고 할 수는 없지만...

http://yhhan.tistory.com/trackback/1311 1. 설국을 읽다가 나는 내 머리가 얼마나 나쁘고 문학을 얼마나 잘 모르는지 깨달았다. 알튀세르와 라캉, 벤야민을 읽으면 나의 나쁘고 못된 머리와 문학에 대한 무지의 수위가 낮아질 것 같아서 이들을 먼저 읽으려고 했는데, 결국엔 안티조선운동사를 가장 먼저 읽었다. 그 이유는 '알튀세르와 라캉'이라는 책의 번역 수준이 아무래도 개똥 같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고, 벤야민의 책들은 아주 긴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안티조선운동사를 집어든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의 저자인 한윤형씨가 신문지상과 블로그를 통해 보여주는 일련의 문제의식들이 매우 나의 흥미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식이 무엇이냐면 한 마디로 공공성과 당파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2.   http://yhhan.tistory.com/trackback/1299  한윤형씨가 블로그에 올린 '정치 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이란 글이다.  글의 내용을 짚어보자. "최장집(+진보신당) : 한국에 복지국가가 오지 않는 이유는 노조조직률이 10%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조직률이 높아지지 않으면 복지국가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복지국가 담론에 파묻히기 전에 노조조직률 확대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이상이 : 노조조직률이 10%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국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조직의 강화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조조직률 문제를 따지기 전에 일단 복지정책 프로세스를 갖춘 정당이 집권하여 복지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 상반된 인과관계 속에서도, "B가 불가능하니 A가 답"이란 초월적 논증이 횡행하지 않는가? - 한윤형" 한윤형씨가 초월적 논증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아래와 같은 글에서 실천적 영역에 있어 심리학의 문제라고 호명하...

다 못읽었다.

* 설국을 아직 다 못읽었다. 중간에 부코우스키를 읽느라 그랬다. 알튀세르와 라캉을 다 못읽었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다 못읽었다. 알튀세르와 라캉을 읽느라, 벤야민을 읽느라 그랬다. 벤야민을 다 못읽었다. 중간에 갑자기 안티조선운동사를 읽느라 그렇게 되었다.  거기다가 어제는 또 라캉의 주체...라고 브루스 핑크 아저씨가 쓴 책을 또 덥석 사들였다. 매우 읽고 싶지만, 알튀세와 벤야민과 설국과 안티조선운동사 때문에 참는다. 아 그냥 들어앉아서 책만 들입다 읽고 싶다. 나는 이러다가 한 두 달 쯤 지나서 책을 다 읽게 된다. * 꼬뮤니스트라고 부른다. 우파와 좌파, 진보와 보수의 모호한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 말이다. 꼬뮤니스트. 다시 말하지만, 연대의 가능성과 그 미래에 대한 존중 없이는 꼬뮤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벤야민

* 벤야민 아저씨를 읽고 있는데, 일단 번역이 그야말로 기계적 번역이라 좀 그렇다. 두번째는 이 아저씨는 철학자나, 인문학자이기 전에 문예 비평가라서 꼬집어 말하는 법이 잘 없다. 글쓰기의 강박으로부터 놓여난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또 반대로 글쓰기의 강박은 또 어떤 것일까. 벤야민 아저씨 같은 이들은 그 정치적 편향과 관계없이 글쓰기의 강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소위 '교양'이라는 걸 채워놓은 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다시 강박이란 무엇인가? 근데, 대부분의 교양이 사적 유물론이 아니라, 역사주의에 함몰되기 쉽상이고, 그 최선의 표현이 역사의 단선적인 진보라고 할 때 그는 단연코 교양인에 머물지는 않았다, 고 나는 믿는다...

사디즘과 히스테리, 유물론과 선재성

* 새디즘은 히스테리증자의 깨진 거울상이다. 히스테리증자가 새디스트를 요청하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데 몰두하는 히스테리증자에게 새디즘은 히스테리증자 자신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거의 유일한 어떤 것인지이면서 동시에 히스테리증자의 탄생을 이끌어낸 '깨진 거울상'의 현현이기도 하다. 새디즘은 히스테리증자가 깨진 거울을 복구하지 않고도,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히스테리증자의 합리 구조를 기준으로 말하면 그렇다. 때문에 사디즘과 매저키즘이라는 묶음은 심리학적 관점은 될 수 있어도, 정신분석의 논리 안에서는 보충설명이 필요한 구분일 것이다.   * 알튀세르는 유물론의 최소정의를 의식의 외부에 현실이 존재한다는 테제라고 말한다. 라캉은, 비슷한 말이지만 의식의 외부에 현실이 '먼저' 존재한다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를 빌려와 유물론적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말은 라캉을 빌려와 말했더라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의식 이전에 존재하는, 자아 이전에 존재하는 언어적 현실 말이다. 라캉의 '선재성'은 유물론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가 우발성의 유물론, 혹은 해후의 유물론으로 변화해가는 이유는 라캉의 관점에서 보아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현존재가 세계의 선재성 앞에서 자신의 기투성을 깨닫는 일이 보편적 존재론의 출발이라고 하면.....인식론의 존재론적 전환....그 사이에 유물론이 있고, 또 헤겔이 있는 거다.

거짓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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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데이빗슨 이야기는 아니다. 평범하게 사는 일이 더 힘들고 값진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이야기다. 거짓말이잖아, 맹목적이잖아! 눈이 가렵다. 원래 나는 온 몸이 눈이었다.

알튀세

* 알튀세 아저씨는 머 나한테는 그냥 라캉 친구다. 아직 더 자세히 읽지 못해서 그렇지만. 그리고 아마도 좀 더 있으면 둘이 분화하는 첨예한 지점들이 나타나겠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라캉을 좀 들여다본 덕에 조금 수월하게 읽어내려가고 있다. 라캉-알튀세-(발리바르)-들뢰즈....뭐 대충 이정도 지도로 당분간 헤맬 듯. 메를로 퐁티의 정치 평론을 읽다가 걍 접었다. 머 굳이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요즘은 아부지한테 이틀 걸러 한번씩 전화를 드린다. 주위 친구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들이 들려서 안부 겸 전화를 드리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 호방한 남자같지만 또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는 남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