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댄 왠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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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댄 왠지 달라요.

비가 내린다

* 그저께 밤에 목감기 때문에 목이 칼칼하다, 바짝 마른다는 기분으로 잠들어 있었는데, 잠 자고 있는 중간에 비가 내리는 거다. 비가 내리면서 집안의 공기가 일순 부드러워지고, 잠자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더랬다.

4월 5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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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5일은 커트 코베인이 죽은 날이다. 내 십대 후반의 백그라운드 뮤직 같은 너바나. 학교도 안가고 텅 빈 거실에서 LP를 걸어놓고 너바나로 공기를 박박 긁는 날들이 많았다. 이제는 머 무슨 티브이 광고 음악 같은 걸로도 나오지만...으으으...가끔씩 아직도 그의 음악을 찾아서 듣는다. 음, 내가 그를 딱 한번 안좋아했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지같은 언플러그드 열풍에 합류해 언플러그드로 콘서트를 열어 가지구, 엠티뷔가 폭발하던 때였다. 난 그때 나의 커트 코베인마져 병신같은 언플러그드 어쩌구에 한 발 담그는 걸 보고 막 화가 났더랬다. 병신같은 언플러그드! 병신같은 언플러그드!! 그치만, 세월이 한참 지나서 그 공연을 다시 찾아서 듣고 있다. All Apologirs ......봄이다...

M.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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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만화 터치에 갑자원 진출을 위한 지역 결승전 날짜가 '1986년 7월 30일'로 나온다. 만화를 보다가 그해 우리나라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뒤적거려보니 음....묘하다. * MOT 2집에 나오는 시니피에, 라는 노래다. 글쎄, 내 고통만큼 너도 고통스러웠으면 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노동가치론에서 한계효용으로 ㅋ

* 작업 할때 내가 안전모를 쓰는 이유는, 떨어져 내리는 자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곤두박칠 치게될 내 머리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강박적으로 올라가는 건물들과 공정을, 날뛰는 내 머릿속의 상상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나는 쉽게 진정되지 않는 혼돈이고, 안전모는 건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혼돈 위에 덮어 놓은 뚜껑이다. 그러므로, 내가 매일 받아가는 수당은 그 뚜껑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한 것이지, 내 노동의 댓가가 아니다. 그 뚜껑의 비용은 기업,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사회적 비용과 내 팔다리를 혼돈으로부터 분리해내 예측가능한 공정의 일부로 만들기 위한 도구적 합리의 댓가를 합한 것이다.    노동의 댓가라든가, 교환 가치라는 환상은 이와 같은 합리, 윤리의 이름이다. 글쎄, 나는 합리의 가장 극단적인 현상이 윤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윤리는 또 본질적으로 강박적이다. 합리는 왜 자신의 누빔점을 은폐하는 데 몰두하게 될까? 저 안전모와 같은 누빔점들이야말로, 합리라는 환상의 출발점이고, 풍요로운 서식지다. * 사랑을 폭력으로부터 더 이상 구별해낼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사랑과 폭력의 경계를 무너뜨릴 때까지 전진한다. 무엇이든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는, 무지막지한 순간이 나를 덮친다. 사랑은 국경도, 인종도, 경계도 없다는 말은 실은 이렇게나 잔인한 사랑의 본질을 담고 있다. 폭력으로 전이되는 혁명이 그러하다. '아이엠러브'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 폭력은 종말론적 결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음악을 왼쪽에 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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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왼쪽에 두기로 했다. 왼쪽에 있는 음악. 집에 부모님이 올라오셨는데, 어머니가 나보고 잘 생겼다고 했다. 아버지는 점점 더 여자 노인처럼 변해간다고 할까. 3일 동안 씼지 않고 있다가 씼었더니, 그야말로 발가벗은 느낌이랄까. 날씨가 너무 따뜻하다. 이태원에 과일을 사러 갔다. 오이를 사러 갔는데, 살 수가 없었다. 이태원에는 오이를 팔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셔츠를 두 개 맞췄다. 화요일날 찾으러 갈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알튀세르를 읽는데, 글쎄 그는 여자 사람을 증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또 그것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더 나아가 여자 사람들이야말로 남자 사람이 존재로써 불가피하게 갖고 있는 '결핍'을 목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게다가 연민도 없이. 연민도 없이. 

여전히 안티조선 운동사 리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유물론자가   그러나 유물론자가 가지는 '선재성'에 대해서 나는 아랫글과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의식에 대한 현실의 선재성을 공공성과 당파성의 관계에 대입하기 전에, 당파성 그 자체에 대해 말해보자. 당파성은 결국 '의식'보다 먼저 존재하는 '계급 갈등' 혹은 '계급 문제'의 선재성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공공성'이라고 호명하는 어떤 것이 공동체적인 가치 이전에 '공리주의'적인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당파성은 계급적 자기 정체성 이전에 계급 이해의 문제다. 그렇다면, 공공성은 당파성의 선재적 조건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당파적 이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공성을 끊임없이 '가치' 혹은 '공정성'으로 호명하면 할수록 나는 그것이 '공리주의'적 지향을 은폐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손쉽게 공리주의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계량화가 불가능한 인간을, '평균'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호명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는 배제의 논리를 기반으로 한 프로크루스테스식의 합리화를 '인간 일반'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때문에 나는 공공성은 당파성 이전에 존재하는 선재적 조건이라거나 혹은 당파적 이해를 떠난 게임의 룰, 윤리라는 생각에 저항하고자 한다. 공공성은 아무리 양보해도 적대적 당파성이 갈등하는 장소이며, 모든 당파적 이해가 잠시 멈추는 지점이 아니라, 모든 당파적 이해가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왜? 공공성이 배제의 논리를 통해 형성되는 과정에서 편입을 위한 경쟁과 이해의 충돌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공성이 좌초되는 지점은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아니라, 차이가 배제, 혹은 무화되거나 차이가 '일반화'되는 지점이라고 해야 맞다.  특히 저 차이의 '일반화'...

안티조선 운동사 리뷰라고 할 수는 없지만...

http://yhhan.tistory.com/trackback/1311 1. 설국을 읽다가 나는 내 머리가 얼마나 나쁘고 문학을 얼마나 잘 모르는지 깨달았다. 알튀세르와 라캉, 벤야민을 읽으면 나의 나쁘고 못된 머리와 문학에 대한 무지의 수위가 낮아질 것 같아서 이들을 먼저 읽으려고 했는데, 결국엔 안티조선운동사를 가장 먼저 읽었다. 그 이유는 '알튀세르와 라캉'이라는 책의 번역 수준이 아무래도 개똥 같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고, 벤야민의 책들은 아주 긴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안티조선운동사를 집어든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의 저자인 한윤형씨가 신문지상과 블로그를 통해 보여주는 일련의 문제의식들이 매우 나의 흥미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식이 무엇이냐면 한 마디로 공공성과 당파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2.   http://yhhan.tistory.com/trackback/1299  한윤형씨가 블로그에 올린 '정치 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이란 글이다.  글의 내용을 짚어보자. "최장집(+진보신당) : 한국에 복지국가가 오지 않는 이유는 노조조직률이 10%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조직률이 높아지지 않으면 복지국가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복지국가 담론에 파묻히기 전에 노조조직률 확대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이상이 : 노조조직률이 10%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국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조직의 강화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조조직률 문제를 따지기 전에 일단 복지정책 프로세스를 갖춘 정당이 집권하여 복지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 상반된 인과관계 속에서도, "B가 불가능하니 A가 답"이란 초월적 논증이 횡행하지 않는가? - 한윤형" 한윤형씨가 초월적 논증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아래와 같은 글에서 실천적 영역에 있어 심리학의 문제라고 호명하...

다 못읽었다.

* 설국을 아직 다 못읽었다. 중간에 부코우스키를 읽느라 그랬다. 알튀세르와 라캉을 다 못읽었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다 못읽었다. 알튀세르와 라캉을 읽느라, 벤야민을 읽느라 그랬다. 벤야민을 다 못읽었다. 중간에 갑자기 안티조선운동사를 읽느라 그렇게 되었다.  거기다가 어제는 또 라캉의 주체...라고 브루스 핑크 아저씨가 쓴 책을 또 덥석 사들였다. 매우 읽고 싶지만, 알튀세와 벤야민과 설국과 안티조선운동사 때문에 참는다. 아 그냥 들어앉아서 책만 들입다 읽고 싶다. 나는 이러다가 한 두 달 쯤 지나서 책을 다 읽게 된다. * 꼬뮤니스트라고 부른다. 우파와 좌파, 진보와 보수의 모호한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 말이다. 꼬뮤니스트. 다시 말하지만, 연대의 가능성과 그 미래에 대한 존중 없이는 꼬뮤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벤야민

* 벤야민 아저씨를 읽고 있는데, 일단 번역이 그야말로 기계적 번역이라 좀 그렇다. 두번째는 이 아저씨는 철학자나, 인문학자이기 전에 문예 비평가라서 꼬집어 말하는 법이 잘 없다. 글쓰기의 강박으로부터 놓여난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또 반대로 글쓰기의 강박은 또 어떤 것일까. 벤야민 아저씨 같은 이들은 그 정치적 편향과 관계없이 글쓰기의 강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소위 '교양'이라는 걸 채워놓은 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다시 강박이란 무엇인가? 근데, 대부분의 교양이 사적 유물론이 아니라, 역사주의에 함몰되기 쉽상이고, 그 최선의 표현이 역사의 단선적인 진보라고 할 때 그는 단연코 교양인에 머물지는 않았다, 고 나는 믿는다...

사디즘과 히스테리, 유물론과 선재성

* 새디즘은 히스테리증자의 깨진 거울상이다. 히스테리증자가 새디스트를 요청하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데 몰두하는 히스테리증자에게 새디즘은 히스테리증자 자신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거의 유일한 어떤 것인지이면서 동시에 히스테리증자의 탄생을 이끌어낸 '깨진 거울상'의 현현이기도 하다. 새디즘은 히스테리증자가 깨진 거울을 복구하지 않고도,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히스테리증자의 합리 구조를 기준으로 말하면 그렇다. 때문에 사디즘과 매저키즘이라는 묶음은 심리학적 관점은 될 수 있어도, 정신분석의 논리 안에서는 보충설명이 필요한 구분일 것이다.   * 알튀세르는 유물론의 최소정의를 의식의 외부에 현실이 존재한다는 테제라고 말한다. 라캉은, 비슷한 말이지만 의식의 외부에 현실이 '먼저' 존재한다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를 빌려와 유물론적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말은 라캉을 빌려와 말했더라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의식 이전에 존재하는, 자아 이전에 존재하는 언어적 현실 말이다. 라캉의 '선재성'은 유물론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가 우발성의 유물론, 혹은 해후의 유물론으로 변화해가는 이유는 라캉의 관점에서 보아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현존재가 세계의 선재성 앞에서 자신의 기투성을 깨닫는 일이 보편적 존재론의 출발이라고 하면.....인식론의 존재론적 전환....그 사이에 유물론이 있고, 또 헤겔이 있는 거다.

거짓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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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데이빗슨 이야기는 아니다. 평범하게 사는 일이 더 힘들고 값진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이야기다. 거짓말이잖아, 맹목적이잖아! 눈이 가렵다. 원래 나는 온 몸이 눈이었다.

알튀세

* 알튀세 아저씨는 머 나한테는 그냥 라캉 친구다. 아직 더 자세히 읽지 못해서 그렇지만. 그리고 아마도 좀 더 있으면 둘이 분화하는 첨예한 지점들이 나타나겠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라캉을 좀 들여다본 덕에 조금 수월하게 읽어내려가고 있다. 라캉-알튀세-(발리바르)-들뢰즈....뭐 대충 이정도 지도로 당분간 헤맬 듯. 메를로 퐁티의 정치 평론을 읽다가 걍 접었다. 머 굳이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요즘은 아부지한테 이틀 걸러 한번씩 전화를 드린다. 주위 친구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들이 들려서 안부 겸 전화를 드리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 호방한 남자같지만 또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는 남자이기도 하다.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 요즘 이연주의 시집을 매일 매일 갉아먹고 있다. 새벽 두시. 나는 노오란 핸드 랜턴 불빛에 의지해서 이연주를 읽어 내려간다. 위악이라고? 실천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시도를 그렇게 부르는 건 '이미지'가 작동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미지는 작동하잖아? 어떻게? 단절을 매개로! 못박음을 시작으로!! 매음녀의 이미지는 히스테리증자가 시도하는 인식론적 단절의 시도다. 매음녀의 이미지를 불러내는 주체는 히스테리적 망치질을 시도하는 것이다.  히스테리 주체는 기본적으로 타자의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 실패한, 그래서 타자의 질서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주체다. 그래서 그는 그 의심에 사로잡히기 전에 더 강력한 타자의 질서를 요청한다. 그는 타자의 욕망을 강화하고, 그 스스로 그 욕망에 합당한 대상이 됨으로써 이를 추인받고자 하는 주체다. 매음녀의 이미지는 이와 같은 히스테리 주체의 구조와 닮아 있다. 그러나 히스테리 주체는 매음녀의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를 불러내지만, 실천의 영역까지는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돈으로 교환되는 매음녀는 결정적으로 '교환불가능성'이라는 히스테리 주체의 존재론적 질문, 그 강박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히스테리 주체의 탄생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존재가 주체에게 묻는 '교환가능/ 불가능'의 질문의 반복과 강박일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많은 질서들이 '자본주의 전략'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히스테리 주체는 상징적 차원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일 수도, 또 가장 非자본주의적인 예외적 존재일 수도 있는 주체다.....

구체적 구체적

* 블로그가 자동으로 이전되었다.  겨울이다. 내 머릿 속에는 단백질로 만든 폭탄이 들어 있다. 당분간은 좀 과장 같더라도 그런 생각으로 살아야겠다.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임석진 선생, 아니 헤겔의 '정신 현상학', 레닌 평전2, 최재희 선생 번역의 순수이성 비판과 백종현 선생 역의 실천이성 비판....내가 연말에 아마도 사들이게 될 책들이다. 아 젠장 헤겔은 언젠가는 보게 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냥 안보고 넘어갔으면 하는 책이기도 했다. 1. 제임스 낙트웨이라는 전쟁 사진가의 다큐를 본다. 전쟁 사진가....아니, 그냥 그도 전쟁의 일부이다. 전쟁의 모든 것이 악하지는 않다. 모든 전쟁은 악하지만, 전쟁의 모든 것이 악하지는 않다. 어쩌면 우리가 전쟁을 결코 없앨 수 없다면, 되도록이면 가장 덜 고통스러운, 덜 악한 전쟁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나는 차가운 낙관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2. 그러나 나는 영원을 목격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전쟁을 결코 없앨 수 없다는 말은 나의 도피처에 가깝다. 논증할 수 없는 말이며, 사실이 아니라 가치 판단에 불과하다. 나에게 구체적이라는 말은 그래서 논증할 수 없는 영원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일 것이다.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방법이 있다면 오로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명제 뿐이다. 구체적인 모든 것은 언뜻 재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재현은 영원에 복무하기 위한 강박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것은 한번도 재현적이었던 적이 없다.

테스트

졸리네

자유냐, 목숨이냐

* 자유냐, 목숨이냐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질문에는 자유와 목숨, 두 가지가 다 가능한, 이를테면 공통분모를 제거한다는 전제가 은폐되어 있다. 자유를 선택하면 목숨이 없는데, 목숨이 없는 자유는 불가능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 은폐된 공통분모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는 중요한 문제다. 그 공통분모가 자유냐 목숨이냐의 이분법 내부의 교집합에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유냐 목숨이냐라는 질문 전체의 바깥, 그 예외적 존재로 볼 것인지는 사유 전체의 중요한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저 중요한 갈림길의 존재를 나한테 알려준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는 저 두 길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이해한 라캉은 그렇다. 그는 타인의 모순을 지적할 때는 그들의 이분법 내부의 교집합과 그 어두운 단면인 섹터주의를 비판하지만, 그러나 실재의 도래가 저 예외적 존재로부터 오는 것인지, 은폐된 교집합의 장에서 일어나는 돌발인지를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공부가 부족한 것이기도 하겟지만...    내가 들뢰즈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이유는 저 갈림길의 존재가 선명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보신당과 민노당이 다시 합당 논의에 들어갈 것 같다. 합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연합. 좌파들은 저 둘 내부의 은폐된 공통분모, 혹은 폐쇄된 섹터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들 바깥의 돌발적 예외가 될 것인가.....여기까지가 금요일 밤 문득 내가 생각한 내용이다. 친구와 친구의 애인과 그 애인의 친구들과 어쩌다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친구 애인 왈 친구 가운데 A양과 B양 중 누가 더 이쁘냐는 거다.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생각이 내달렸다.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기관차처럼 자유냐, 목숨이냐부터 진보신당의 좌파들 생각까지. 피곤하면 생각이 내달린다. 머 한 마디도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전두엽 장애인가, 싶었다.   * 아니 시발 그럼 통닭 배달하는...

또 눈왔다

* 또 눈이 왔다. 이번에는 후둑후둑 함박눈. 날이 추워서 아침에는 잠깐 길에 쌓여 있다 녹았다가, 지금 다시 눈온다. 눈이 오면 나는 생각한다. 아니 생각이 저 혼자 선명하다. 내가 생각을 통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눈온다. 당신 생각이 저 혼자 또렷하다.   * 들었던 노래를 또 듣기도 한다.  

구름

* 자연이 좋다, 숲이 좋다, 그런 이야기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숲도 좋고, 나무도, 풀도, 꽃도 좋다. 그런데, 우리가 숲을 좋아하는 이유가 숲과 나무가 측정할 수 없는 신비를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사실에는 반대한다. 내가 겪은 숲, 내가 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발성이 그곳을 지배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숲에서 우발성에 대해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발적이고, 가시적인 현상은 구름이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안 구름은 그야말로 원형을 가지지 않는 '현상' 그 자체다. 나는 '나'라는 우발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를 원한다. 대부분의 '나'는 일종의 기시감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발견이지만 구름이야말로 그 발견의 바깥을 보여준다.....'나'라는 관성은 원형을 가졌다는 환상이 없다면 그져 일종의 접촉점에 지나지 않는다. 구름은 흩어지는 동안에도, 다시 모여 구성되는 동안에도 구름으로 호명된다. 감각적 실존의 차원은 우발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건 그거구. 나는 알고 보면 감정이 잘 일어나지 않는 타입이다. 냉정한 건 아닌데, 감정의 계기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사실 감정이라는 건 일정한 계기 그 자체가 불러오는 게 아니라, 그 계기들이 어떤 저항을 통과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한테는 그 저항이 없다. '나'라는 기시감 같은 게 잘 없는 거다. 그런데, '나'의 구성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즉 그 기시감의 정체는 타인들이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으므로....근데, 이 기사감을 깨뜨리는 존재가 나타나면 '나'는 비로소 저항을 통과하는 것이다.     * 이택광 아저씨로부터 촉발된(?) 라캉주의 논쟁(?)을 보고 있자니 이건 뭐...지나치게 한심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논쟁 주위로 모여드는 수많은 이상한 사람들의 논란보...

크리스마스에 대하여

*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는 12월 26인가? 입대했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의 제대날짜는 2월. 복무기간은 26개월이었다. 그치만 크리스마스는 나의 제대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므로 군복무 말기에 나는 지상의 모든 크리스마스 캐롤을 듣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제대 6개월 정도를 앞두고 내가 소속된 부대는 동해안에 철책을 다시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장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분대원들에게 그날의 크리스마스 캐롤 합창을 시켰다. 왜냐하면, 나의 크리스마스는 나의 제대를 위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나는 분대장이었으니까.   아무튼 나의 크리스마스 캐롤에는 차가운 바닷바람과 작업장에서 돌아오는 젊은 군인들의 노랫소리와 해 떨어지는 해안선의 가파른 풍광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