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 똥이 되든, 밥이 되든 혁명 한번 했으면 좋겠다. 진짜 똥이 되든 밥이 되든. 대한민국은 너무 숨막히는 곳이다. 좃같은 씨발 대한민국. 가끔 잊고 살다가도 눈을 들어 보면, 욕만 나온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면 분노가 증오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다. 이어폰으로, 음악으로 세상의 소리로부터 멀어지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코끼리가 차지한 세계

* 방 안에, 몸 안에, 주머니 속에, 머릿 속에 코끼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때까지 코끼리는 만질 수는 있지만,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코끼리를 어떻게 격리할 것인가, 혹은 코끼리의 생태계와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혹은 코끼리를 어디에 감춰둘 것인가, 하고 머리를 굴려봅니다. 코끼리는 불어나지 않지만, 코끼리에 대한 질문들만 불어나 둑을 넘습니다. 결국 우리는 가난하게도, 그 질문들을 막는 데 급급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코끼리가 사라지고 코끼리에 대한 질문만 남아 있는 세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은 코끼리를 살해하고, 간신히 그 질문만 떠도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코끼리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장님에, 거짓말쟁이입니다. 코끼리는 어디로 갔나요? 가장 잘못된 질문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코끼리가 방안에도, 몸안에도, 주머니속에도, 머릿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코끼리가 세계를 완전히 차지해버린 곳에서는 코끼리는 소속도, 섹터도, 좌표도 없이 존재합니다. 만질 필요도, 볼 필요도 없죠. 코끼리가 세계 그 자체, 아니 코끼리가 턱없이 비좁은 세계 바깥으로 삐져나옵니다. 코끼리가 예외까지 전부 다 차지해버린 세계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거짓 딜레마, 당신의 잘못된 질문을 코끼리가 부숴버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관찰자가 아니라, 목격자가 되어 증인석으로 불려 나왔습니다. 당신은 모든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적 취향과 도덕, 위치와 세계관에 하등 상관없는 사실 그 자체만을 간신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세요. 당신은 침묵하거나 대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고통은 예외가 존재할 때에 가능합니다.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때,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죠. 고통이 전부인 세상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코끼리가 전부인 세상이 당신을 목격자로 세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거...

데니스 루헤인과 스타크2

* 이틀 동안 회사에서 틈틈이, 꼬박 꼬박 시간을 내어 스타2 캠페인 26개를 모두 클리어했다. 그리고 나서는? 스타크를 다 지웠다. 스타크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건 데니스 루? 르? 헤인. 켄지& 제나로 라는 탐정들이 나오는 하드보일드 소설이다. 완전 재밌네. 무엇보다 평소 나의 지론이랄 수 있는 '예술은 동네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는 정언명령을 잘 보여주는 소설들이다. 연쇄 살인마도, 마피아도, 소아성애자도, 마약쟁이도, 경찰도, 전부 다 동네에 사는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올 여름은 루? 르? 헤인과 함께 날 것 같다.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를 먼저 읽었는데, 밤을 꼬박 샜다. 무지 재밌네. 레이먼드 챈들러 이후 하드보일드에 빠진 것은 또 오랫만이다.    

바울

* 바울은 나에게 교회를 통하거나, 성경을 통하거나, 혹은 역사적 기독교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예수에 이를 수 없다는 절망을 보여준다. 더 절망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이해하거나 믿고 있는 예수는 우리가 그에게 도달할 수 없는 절망 안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재차 확인해주는 존재에 가깝다. 신앙은 이처럼, 끝내 예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이, 우리가 그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기만적 가능성을 압도할 때에만 나에게 도래한다.   바울은 꼭 예수가 고향에서 배척당했듯이, 유대인 공동체의 편협한(?) 신앙과 완고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집단 윤리를 포기하고 이를 로마의 종교, 보편의 신앙으로 전환시켰다. 보편성, 로고스...베버가 이성 종교라고 부른 기독교의 특징적 철학은 이 전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공관복음들이 오히려 바울의 서신들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들보다 역사적으로 후대 혹은 비슷한 시기에 기록, 편집되었다는 사실은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바울을 통해 예수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바울은 신앙이라는 것이 가지는 보편을 발굴해내기 위해서, 유대 공동체의 도덕으로부터 예수의 케리그마를 분리시켜 내었다. 그가 기독교 박해라는 퇴행적 정치를 거듭하던, 네로의 로마로 돌아간 것은 신앙인으로써의 결단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던 네로 이전의 로마, 시민적 공공성, 보편성으로써의 신앙을 승인하라는 요구로 작동했다....고 생각한다.   * 사실 신앙이란 것의 강력함, 밀도는 그 근거들의 허약함을 보완하려는 성질로부터 태어난다. 종교적 히스테리란 말은 그래서 신앙의 어떤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다....   * 근데 사실 이미 바울 이전에 대대적인 이주 정책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가 지배하던 여기 저기...

리얼리티

* 한국에는 노동계급의 삶을 묘사하는 문학도, 방법도 더 이상 없다. 리얼리티는 엄연히 존재하는 노동계급을 상상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그렇다면, 상상하자!!

에드워드 양 / 청소년의 전화

*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었다. 죽은 사람이다. 난 인간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아니 나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한편 그가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나는 그의 영화들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들은 유한한 한 인간의 자장에서 벗어나고, 또 죽음은 그가 자신의 영화들을 더 이상 망칠 수 없게 만드니까. 죽기 전에 그는 무슨 애니메이션인가를 만들고자 한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뭐야 그게. 그의 영화들은 참 멋졌댔다. 자살한 록스타를 좋아하듯이 에드워드 양을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좀 곤란하긴 한데, 나는 그가 참 좋았고 좀 곤란했다.   * 청소년의 전화, 여성의 전화, 생명의 전화, 사랑의 전화......뭐 하는 사람들 일까. 성격이 삐뚤어져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병신 같애.

연애의 목적 2

* 연애의 목적의 해피엔딩은, 강혜정이 다시 박해일을 찾아간 시점이 아니라, 강혜정이 돌변해서 박해일을 고발하는 지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강혜정이 피해자의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박해일을 가해자로 지목하는 순간은 강혜정이 자신의 존엄을 되찾는 순간이고, 사랑은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존엄을, 어떤 방법으로든 지켜주는 일이어야 한다. 우리는 피해자를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 나약해서 피해자가 그 자리를 벗어나 온전해질 때에만 그를 사랑할 수 있다. 로맨스는 위로가 아니니까......    강혜정이 피해자의 자리로부터 벗어나 온전해지는 단순한 방법은 스스로 가해자의 자리를 선취하는 것이다. 짐승같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해자로의 자기 전환에서 필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증오를 귀속시킬 수 있는 나 아닌, 다른 누구이다. 피해자가 극도로 고립된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은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쉽다는 것 역시 비인간적이지만, 자연스럽다.    로맨스는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이 엄연한 진실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랑이고 나발이고, 다 거짓말이다. 연애의 목적의 리얼리티는 그 고발의 순간에 박해일이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몰아넣지 않고, 희생자를 자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강혜정이 가해자의 자리를 적극적을 선취하는 순간에 있다. 피해자에 대한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탈정치의 공간은 이와 같은 '가해자의 존엄'이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가 없다. 여담이지만, 연애의 목적에 나오는 이들 중에 가장 로맨스가 필요한 존재는 '국어 선생'일 것이다. 자각증상 없는, 혹은 자각 증상을 적극적으로 지워버린 피해자는 자각증상 없는 가해자가 되기 쉬운 법이다.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홀로 버려진 길 위에서 견딜 수 없이 울고 싶은 이유를 나도 몰래 사랑하는 까닭을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 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 할까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 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 할까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밥벌이의 신성함, 밥벌이의 환멸

* 밥벌이는 치욕적이다. 밥벌이는 그러나 신성하다. 치욕적이지만, 밥벌이를 통해 생을 영위한다는 사실 자체는 엄연하고, 엄숙하다. 김훈의, 때로는 이성복의 논리들이다. 저 밥벌이의 신성함과 환멸의 이분법이 밥벌이의 정치적 함의를 휘발시킨다. 밥벌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통용되고, 밥벌이라고 하면 무슨 일이든지 폄훼된다. 밥벌이를 위해서라면, 학살자의 용비어천가를 써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도 조금은 관대하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밥벌이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는 일, 밥벌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해내는 일은 밥도 벌고, 명분도 얻으려는 순수하지 못한 행위가 된다. 밥벌이는 쾌락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부르조아들은 밥벌이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밥벌이가 아니라 쾌락원칙에 충실한 행동일 뿐이다. 그것을 재테크라고 부르고, 게임 이론으로 설명해내고자 하는 우파들의 논리를 밥벌이의 지옥에서 사는 이들이 앵무새처럼 따른다. 부르조아는 자기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 곧 경제 활동이 된다. 밥벌이의 엄연함, 밥벌이의 치욕에서 벗어나려면 부르조아가 되는 길 밖에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밥벌이 성찰하는 이들은 없다. 어디까지나, 자아 이상에 가까운 부르조아의 자리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밥벌이를 들여다본다.    밥벌이라는 치욕과 신성, 이 이분법을 부수어야 한다. 노동은 자가발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자주 잊어버린다. 자수성가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밥벌이의 치욕과 환멸의 이분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람들이 대개 소위 자수성가했다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은 자수성가라는 허구를 통해 노동의 교환관계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자수성가했다고 믿는 이들이야말로, 밥벌이의 치욕과 환멸, 밥벌이의 탈정치성을 앞서서 전파하는 전도사들인 이유가 여기 있다.   ................

연애의 목적 / 오, 사랑

* 연애의 목적을 보고, 버로스의 정키,를 읽기 시작했다. 파시즘과 관련한 머...오덕짓의 계속으로 책을 하나 사고....   * 사랑, 더 구체적으로 연애는 교환불가능성을 더듬더듬 확인하는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나에게 교환불가능한 타자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왜 h를 사랑하지 않고, m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은 비교 우위가 아닌, 교환 불가능성을 묻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인과의 허구를 폭로하는 질문이다. 인과 관계 즉 상징적 질서는 새로운 고정점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사슬을 끊고,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교환불가능한 그, 그녀가 그 미끄러짐을 멈추어 줄 때까지, 우리는 완전히 능동적으로, 수동성에 몸을 맡긴다.   * 히스테리증자는 이 고정점 만들기에 실패를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은 상징 질서의 인과 관계가 언제든지 미끄러질 수 있다는 불안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인과 관계의 허약함을 보완하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압도하는 무엇을 추구한다. 니체가 '진리란 힘을 잃어버린 은유'라고 말한 뜻이 여기에 있다.   * 그렇다면 내가 나의 교환불가능성을 극대화하려면, 육체를 버려야 한다. 나는 완전한 추상, 육체가 없는 공기, 영혼의 결정체 같은 것이어야 한다. 육체가 없어야, 나의 교환불가능성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교환불가능성은 교환가능성을 근거로 가진 차별성이지, 초월성이나 유일성이 아니다. 그와 같은 차별성을 구체성이라고 부르자. 육체에서 출발하는 교환불가능성. 당신의 눈, 코, 입, 냄새, 발가락, 머리카락......    

그냥

창문/ 사표/ 형식 합리성

* 누구의 것도 아닌 창문, 창문의 것도 아닌 구름....기형도의 창문은 아무도 비추지 않는다. 흩어져나가는 구름이 잠시 비출 뿐이다. 기형도의 창문은 너무나 투명해서 창문 앞에 선 자를 비추지도 아니하고, 세계를 열어보여주지도 않는다. 기형도의 창문이 보여주는 것은 거기 못박혀 죽을 운명을 감당하는 주체를 보여줄 뿐이다.   * 선거에서 '사표'라는 용어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배반하는 근거가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의 정치 공학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국 형식 합리성이 주체의 윤리를 압살해도 된다는 뜻이나 다름 없다. 절차적 합리성이 지켜지면 내용의 합리성이 보장된다는 무의식적 전제들, 기계적 균형, 윤리를 압도하는 형식, 사라지는 주체....형식 합리성에 대한 맹목은 '직접' 민주주의조차도 그 형식의 우월을 통해 평가하는 방식으로 변형된다. 이때 직접 민주주의의 '직접성'은 정치 주체의 자기 동일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형식 그 자체의 직접성이다. 아마 궁극적으로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주의(?)' 가 될 것이다.

어렴풋이

* 머릿속에서 쿵쾅거리는 심장, 두통, 어질머리, 신열 같은 거. 어딘가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가 욱씬 거리며 남아 있는 통증 같은 거. 그 통증을 먹고, 통증 위로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는 문장들.....내 위로 급행열차가 지나갔다.....한 밤 중에 멍청하게 일어나 물마시고, 참외 깎아 먹고, 만화책 들여다보다가 노트를 만져본다. 다 식었다.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내 위로 급행열차가 지나갔다.  

외롭겠다

* 심상정 대표가 경기도지사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런데 당원들이 유시민 지지로 돌아설 가망이 있을까...유시민이 이번 선거에서 패배하면, 유시민도 외로워지고, 심상정도 외로워지고, 진보신당도 이미 외로운 거 더 외로워지는 결과를 나을 것이다. 서로서로 외로워지는 길을 선택한 게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심상정 대표가 선거 기간 내내 사무치게 외로워서, 어디 니들도 함 외로워봐라...이런... 억하심정이 아니었기를...이런 못난 생각까지 든다.   * 확실히 현대시는 언어의 기능적 함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운동의 성격은 좀 여러가지다. 이를테면 '우산'이라는 말의 지시적, 자의적 의미(실은 언어에 자의적 의미라는 건 없다)를 완전히 제거하고, 우산-전화- 연필...과 같은 자유연상을 통한 언어의 연쇄, 관계의 상징화로 나타나는 경우가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주부생활 5월호' 같은 말을 시적 언어 안으로 편입시키는 운동이다.    기능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교환가능하다는 말이다. 현대시가 이 교환불가능성을 사수하기 위해 거쳐온 운동의 역사는 그래서 흥미진진하지롱.  

본격 좌파 정당....

* 이번 선거가 끝나면, 진보신당은 본격 좌파 정당이....될 것만 같다...이런 저런 사람들이 난리를 칠 것이고, 그러고나면 얼어죽을 각오를 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오갈 데 없는 이들만 이곳에 남을 것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라면 뭐...좌파들 밖에 없잖아.... 좌파를 빼고, 나머지들은 한 걸음씩 오른쪽으로 옮겨 가면 뭐 한 줌의 좌파들만 남는 거지. 가난의 대물림이 아니라, 고난의 대물림. 그래도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안그러면 저들은 또 저들이 얼마나 오른쪽인지 잊어버리게 될거야.

부인(否認) / 도착 / 합리

* 도착은 부인이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도착은 그래서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존재이므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착자들이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존재의 인과를 추궁하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를 추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이유를 스스로 생산할 수 없다. 존재의 기투성은 그래서, 상징성과 상호 의존적이다.) 그 인과가 치밀할수록, 자세할수록 도착자는 '존재 여부'에 더 늦게 도달한다. 그런데,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부재를 믿는다. 그는 '존재 여부'에 도달하는 것을 지연시키지만, 또한 '부재의 확인'이 스스로에게 도래하는 것을 지연시키고 있기도 하다. 도착의 뫼비우스는 이처럼 안과 바깥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도착은 역전이 아니라, 구분과 차이의 폐기다.    

양아치를 위한 정치

* 한참 양아치일 때 우리한테 딱 하나 선생이 있었다. 미군 기지가 자리 잡고 있는 지방 중소도시에 항상 딱 떨어지는 수트를 입고 멋지게 차려입고 다니는 중년의 물리 선생. 내가 자퇴하고 사고치고 싸돌아다닐 때, 나한테 이십만원을 주고 어줍잖은 충고 한마디 안하던 선생. 나한테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우리 패거리들한테 공평하게 관대하셨댔다. 어느 설날에 삥뜯은 돈으로 뭘 사면 좋을까, 같이 놀던 여자애들한테 물어 물어 난생 처음 커프스 단추라는 걸 사들고, 선생 집으로 가는데 전날 술처먹고 나랑 개잡놈처럼 싸웠던 개잡놈이 정종 같은 걸 이쁘게 싸들고 선생 집으로 올라가고 있더랬다.    대가리는 빨갛게 염색을 하고, 귀걸이 하고, 고새를 못참고 또 어느 놈하고 싸웠는지 왼손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가봤자, 인사나 꿈벅하고 사모님한테 주스 한잔 얻어먹고 내려오는 게 다였다. 그 선생한테 찾아가뵌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선생이나, 그 선생 비슷한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개잡놈 생양아치라도 설날 정종을 사서 인사드리러 가는 그 자리에 그 선생 말고 다른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개잡놈 생양아치라도 노동조합원이었으면 좋겠고, 아무리 인격이 진창 하수구라도 자기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사하러 다니는 날들이 설날 말고, 노동절이었으면 좋겠고....내가 정치에 대해서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은 저 대가리를 빨갛게 물들인 어느 생양아치의 모습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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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체어. 갖고 싶다. 덩치가 커서 넓적한 것이 마음에 들고, 내 덩치가 미안하지 않다. 이름도 바르셀로나. 리드미컬한 것이 아름답지 뭐냐. 바르셀로나에 앉으면, 집 천장이 훨씬 높아 보인다....왠지 바우하우스풍에 걸맞지 않는 이름이지만 뭐.   * 집에 있는 바실리. 집이 너무 좁아서, 가방받이로 쓰고 있지만, 아름답고, 편하다. 이 녀석도 바우하우스의 대표선수라고 하는데.... 도도한 녀석인데, 가난하고 비좁은 집에 와서 천대받고 있다. 바실리에 가방 대신 내 몸뚱이를 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10년

* 10년 뒤면 나는 50을 눈 앞에 둔 빼도박도 못하는 중년남. 그러고보니 지금도 뭐...중년남이지만...올해 선거판을 보니, 진보신당의 10년이 고난의 행군이 될 것 같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런 말 할 사람도 많고, 내가 한 마디 더 보탠다고 머 의미 있는 발언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이 절망적인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좀 절망적이라도, 비관적이라도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는 믿음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 진보의 역사는 그냥 잔혹하기 그지없다. 누구 말마따나 잔혹사다. 멀리서 바라보면 인간의 합리나, 의지가 거의 전혀 개입하지 않은 그냥 자연의 흐름 그 자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찌보면, 인간의 생물학적 연대기, 세대의 흐름, 동물의 생몰처럼 역사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잔혹하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 내 글쓰기는 그냥 개똥철학과 논리 사이에서 하염없이 왔다갔다 한다. 이 블로를 링크한 분들이 있던데, 걍 지워버리시길 권한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엄밀한 논리도 없고 뭐 그렇다고, 뛰어난 직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책을 읽으시라.   * 노무현 대통령 선거 때도 나는 민노당을 찍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노무현 전대통령이야말로 '선거 혁명'이라고 말할 만한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또한 '선거 혁명'이라는 말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선거 혁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선거가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만큼 모순이 없다. 세상의 어떤 선거도 혁명적일 수는 없다. 혁명이야말로, 선거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이루어내는 일이 아닌가.    건담을 보면 '선거 혁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수사에 가까운가를 잘 알 수 있다. 모빌수트를 타고 우주를 누비며 섬광을 뿜어내는 화려한 전장은 그러나, 커...

바바렐라 오프닝-제인 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