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홀로 버려진 길 위에서 견딜 수 없이 울고 싶은 이유를 나도 몰래 사랑하는 까닭을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 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 할까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 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 할까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밥벌이의 신성함, 밥벌이의 환멸

* 밥벌이는 치욕적이다. 밥벌이는 그러나 신성하다. 치욕적이지만, 밥벌이를 통해 생을 영위한다는 사실 자체는 엄연하고, 엄숙하다. 김훈의, 때로는 이성복의 논리들이다. 저 밥벌이의 신성함과 환멸의 이분법이 밥벌이의 정치적 함의를 휘발시킨다. 밥벌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통용되고, 밥벌이라고 하면 무슨 일이든지 폄훼된다. 밥벌이를 위해서라면, 학살자의 용비어천가를 써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도 조금은 관대하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밥벌이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는 일, 밥벌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해내는 일은 밥도 벌고, 명분도 얻으려는 순수하지 못한 행위가 된다. 밥벌이는 쾌락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부르조아들은 밥벌이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밥벌이가 아니라 쾌락원칙에 충실한 행동일 뿐이다. 그것을 재테크라고 부르고, 게임 이론으로 설명해내고자 하는 우파들의 논리를 밥벌이의 지옥에서 사는 이들이 앵무새처럼 따른다. 부르조아는 자기 쾌락을 추구하는 일이 곧 경제 활동이 된다. 밥벌이의 엄연함, 밥벌이의 치욕에서 벗어나려면 부르조아가 되는 길 밖에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밥벌이 성찰하는 이들은 없다. 어디까지나, 자아 이상에 가까운 부르조아의 자리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밥벌이를 들여다본다.    밥벌이라는 치욕과 신성, 이 이분법을 부수어야 한다. 노동은 자가발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자주 잊어버린다. 자수성가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밥벌이의 치욕과 환멸의 이분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람들이 대개 소위 자수성가했다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은 자수성가라는 허구를 통해 노동의 교환관계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자수성가했다고 믿는 이들이야말로, 밥벌이의 치욕과 환멸, 밥벌이의 탈정치성을 앞서서 전파하는 전도사들인 이유가 여기 있다.   ................

연애의 목적 / 오, 사랑

* 연애의 목적을 보고, 버로스의 정키,를 읽기 시작했다. 파시즘과 관련한 머...오덕짓의 계속으로 책을 하나 사고....   * 사랑, 더 구체적으로 연애는 교환불가능성을 더듬더듬 확인하는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나에게 교환불가능한 타자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왜 h를 사랑하지 않고, m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은 비교 우위가 아닌, 교환 불가능성을 묻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인과의 허구를 폭로하는 질문이다. 인과 관계 즉 상징적 질서는 새로운 고정점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사슬을 끊고,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교환불가능한 그, 그녀가 그 미끄러짐을 멈추어 줄 때까지, 우리는 완전히 능동적으로, 수동성에 몸을 맡긴다.   * 히스테리증자는 이 고정점 만들기에 실패를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은 상징 질서의 인과 관계가 언제든지 미끄러질 수 있다는 불안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인과 관계의 허약함을 보완하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압도하는 무엇을 추구한다. 니체가 '진리란 힘을 잃어버린 은유'라고 말한 뜻이 여기에 있다.   * 그렇다면 내가 나의 교환불가능성을 극대화하려면, 육체를 버려야 한다. 나는 완전한 추상, 육체가 없는 공기, 영혼의 결정체 같은 것이어야 한다. 육체가 없어야, 나의 교환불가능성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교환불가능성은 교환가능성을 근거로 가진 차별성이지, 초월성이나 유일성이 아니다. 그와 같은 차별성을 구체성이라고 부르자. 육체에서 출발하는 교환불가능성. 당신의 눈, 코, 입, 냄새, 발가락, 머리카락......    

그냥

창문/ 사표/ 형식 합리성

* 누구의 것도 아닌 창문, 창문의 것도 아닌 구름....기형도의 창문은 아무도 비추지 않는다. 흩어져나가는 구름이 잠시 비출 뿐이다. 기형도의 창문은 너무나 투명해서 창문 앞에 선 자를 비추지도 아니하고, 세계를 열어보여주지도 않는다. 기형도의 창문이 보여주는 것은 거기 못박혀 죽을 운명을 감당하는 주체를 보여줄 뿐이다.   * 선거에서 '사표'라는 용어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배반하는 근거가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의 정치 공학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국 형식 합리성이 주체의 윤리를 압살해도 된다는 뜻이나 다름 없다. 절차적 합리성이 지켜지면 내용의 합리성이 보장된다는 무의식적 전제들, 기계적 균형, 윤리를 압도하는 형식, 사라지는 주체....형식 합리성에 대한 맹목은 '직접' 민주주의조차도 그 형식의 우월을 통해 평가하는 방식으로 변형된다. 이때 직접 민주주의의 '직접성'은 정치 주체의 자기 동일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형식 그 자체의 직접성이다. 아마 궁극적으로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주의(?)' 가 될 것이다.

어렴풋이

* 머릿속에서 쿵쾅거리는 심장, 두통, 어질머리, 신열 같은 거. 어딘가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가 욱씬 거리며 남아 있는 통증 같은 거. 그 통증을 먹고, 통증 위로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는 문장들.....내 위로 급행열차가 지나갔다.....한 밤 중에 멍청하게 일어나 물마시고, 참외 깎아 먹고, 만화책 들여다보다가 노트를 만져본다. 다 식었다.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내 위로 급행열차가 지나갔다.  

외롭겠다

* 심상정 대표가 경기도지사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런데 당원들이 유시민 지지로 돌아설 가망이 있을까...유시민이 이번 선거에서 패배하면, 유시민도 외로워지고, 심상정도 외로워지고, 진보신당도 이미 외로운 거 더 외로워지는 결과를 나을 것이다. 서로서로 외로워지는 길을 선택한 게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심상정 대표가 선거 기간 내내 사무치게 외로워서, 어디 니들도 함 외로워봐라...이런... 억하심정이 아니었기를...이런 못난 생각까지 든다.   * 확실히 현대시는 언어의 기능적 함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운동의 성격은 좀 여러가지다. 이를테면 '우산'이라는 말의 지시적, 자의적 의미(실은 언어에 자의적 의미라는 건 없다)를 완전히 제거하고, 우산-전화- 연필...과 같은 자유연상을 통한 언어의 연쇄, 관계의 상징화로 나타나는 경우가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주부생활 5월호' 같은 말을 시적 언어 안으로 편입시키는 운동이다.    기능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교환가능하다는 말이다. 현대시가 이 교환불가능성을 사수하기 위해 거쳐온 운동의 역사는 그래서 흥미진진하지롱.  

본격 좌파 정당....

* 이번 선거가 끝나면, 진보신당은 본격 좌파 정당이....될 것만 같다...이런 저런 사람들이 난리를 칠 것이고, 그러고나면 얼어죽을 각오를 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오갈 데 없는 이들만 이곳에 남을 것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라면 뭐...좌파들 밖에 없잖아.... 좌파를 빼고, 나머지들은 한 걸음씩 오른쪽으로 옮겨 가면 뭐 한 줌의 좌파들만 남는 거지. 가난의 대물림이 아니라, 고난의 대물림. 그래도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안그러면 저들은 또 저들이 얼마나 오른쪽인지 잊어버리게 될거야.

부인(否認) / 도착 / 합리

* 도착은 부인이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도착은 그래서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존재이므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착자들이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존재의 인과를 추궁하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를 추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이유를 스스로 생산할 수 없다. 존재의 기투성은 그래서, 상징성과 상호 의존적이다.) 그 인과가 치밀할수록, 자세할수록 도착자는 '존재 여부'에 더 늦게 도달한다. 그런데,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부재를 믿는다. 그는 '존재 여부'에 도달하는 것을 지연시키지만, 또한 '부재의 확인'이 스스로에게 도래하는 것을 지연시키고 있기도 하다. 도착의 뫼비우스는 이처럼 안과 바깥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도착은 역전이 아니라, 구분과 차이의 폐기다.    

양아치를 위한 정치

* 한참 양아치일 때 우리한테 딱 하나 선생이 있었다. 미군 기지가 자리 잡고 있는 지방 중소도시에 항상 딱 떨어지는 수트를 입고 멋지게 차려입고 다니는 중년의 물리 선생. 내가 자퇴하고 사고치고 싸돌아다닐 때, 나한테 이십만원을 주고 어줍잖은 충고 한마디 안하던 선생. 나한테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우리 패거리들한테 공평하게 관대하셨댔다. 어느 설날에 삥뜯은 돈으로 뭘 사면 좋을까, 같이 놀던 여자애들한테 물어 물어 난생 처음 커프스 단추라는 걸 사들고, 선생 집으로 가는데 전날 술처먹고 나랑 개잡놈처럼 싸웠던 개잡놈이 정종 같은 걸 이쁘게 싸들고 선생 집으로 올라가고 있더랬다.    대가리는 빨갛게 염색을 하고, 귀걸이 하고, 고새를 못참고 또 어느 놈하고 싸웠는지 왼손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가봤자, 인사나 꿈벅하고 사모님한테 주스 한잔 얻어먹고 내려오는 게 다였다. 그 선생한테 찾아가뵌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선생이나, 그 선생 비슷한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개잡놈 생양아치라도 설날 정종을 사서 인사드리러 가는 그 자리에 그 선생 말고 다른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개잡놈 생양아치라도 노동조합원이었으면 좋겠고, 아무리 인격이 진창 하수구라도 자기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사하러 다니는 날들이 설날 말고, 노동절이었으면 좋겠고....내가 정치에 대해서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은 저 대가리를 빨갛게 물들인 어느 생양아치의 모습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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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체어. 갖고 싶다. 덩치가 커서 넓적한 것이 마음에 들고, 내 덩치가 미안하지 않다. 이름도 바르셀로나. 리드미컬한 것이 아름답지 뭐냐. 바르셀로나에 앉으면, 집 천장이 훨씬 높아 보인다....왠지 바우하우스풍에 걸맞지 않는 이름이지만 뭐.   * 집에 있는 바실리. 집이 너무 좁아서, 가방받이로 쓰고 있지만, 아름답고, 편하다. 이 녀석도 바우하우스의 대표선수라고 하는데.... 도도한 녀석인데, 가난하고 비좁은 집에 와서 천대받고 있다. 바실리에 가방 대신 내 몸뚱이를 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10년

* 10년 뒤면 나는 50을 눈 앞에 둔 빼도박도 못하는 중년남. 그러고보니 지금도 뭐...중년남이지만...올해 선거판을 보니, 진보신당의 10년이 고난의 행군이 될 것 같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런 말 할 사람도 많고, 내가 한 마디 더 보탠다고 머 의미 있는 발언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이 절망적인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좀 절망적이라도, 비관적이라도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 있는 믿음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 진보의 역사는 그냥 잔혹하기 그지없다. 누구 말마따나 잔혹사다. 멀리서 바라보면 인간의 합리나, 의지가 거의 전혀 개입하지 않은 그냥 자연의 흐름 그 자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찌보면, 인간의 생물학적 연대기, 세대의 흐름, 동물의 생몰처럼 역사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잔혹하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 내 글쓰기는 그냥 개똥철학과 논리 사이에서 하염없이 왔다갔다 한다. 이 블로를 링크한 분들이 있던데, 걍 지워버리시길 권한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엄밀한 논리도 없고 뭐 그렇다고, 뛰어난 직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책을 읽으시라.   * 노무현 대통령 선거 때도 나는 민노당을 찍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노무현 전대통령이야말로 '선거 혁명'이라고 말할 만한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또한 '선거 혁명'이라는 말이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선거 혁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선거가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만큼 모순이 없다. 세상의 어떤 선거도 혁명적일 수는 없다. 혁명이야말로, 선거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이루어내는 일이 아닌가.    건담을 보면 '선거 혁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수사에 가까운가를 잘 알 수 있다. 모빌수트를 타고 우주를 누비며 섬광을 뿜어내는 화려한 전장은 그러나, 커...

바바렐라 오프닝-제인 폰다

새벽 두 시의 글쓰기

* 대략 열두시 전에 시작한 운동이 끝나고, 땀범벅이 된 몸으로 우유마시고, 담배 하나 피우고, 샤워 때리고 나면 이 시간이 된다. 새벽 두시. 비좁은 베란다에서 내다보면 동네가 다 지쳐서 조용하다. 지나치게 부지런한 하루였다.   * 서정주는 '가난은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다. 서정주의 저 말은 나에게 거의 금지된 문장에 가깝다. 금지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했던 자리라는 점에서 저 말은 나한테 갈등으로 되돌아 가게 만든다. 나한테 가난은 남루 이상이다. 부정적인 의미든, 긍정적인 의미든....서정주의 저 문장은 욕망 그 자체를 부인하는 도착이라고 생각한다. 도착이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술은 증상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상을 산다. 서정주의 저 말은 시적인 전문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나갔나...    예술에 있어서 지평, 혹은 비전이라는 말은 그래서 금지와 욕망이 만드는 미학적 양심과 관련된다. 미학적 양심은 금지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주체가 만들어내는 지평, 비전, 벡터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평이나 비전이, 초월적인 타자, 초월적인 가치가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건 그냥 예술가들의 자위행위다. 만일 '가난이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신이 있다면, 그것을 쏘아 넘어뜨려야 한다는 것이 내 미학적 양심의 요지다.   * 낭만주의의 전제는, 양식을 거부하고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표현이 곧 내면에 밀착해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더 말하면 양식이 존재하는 이전의 형식주의 시대에는 '내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낭만주의는 내면을 외재화하면서, 즉 내면을 주체로부터 소외시키면서 발생한 것이다. 낭만주의가 중앙집권국가의 탄생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국가가 각 개인들을 개별적으로 호명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탈주술화시켰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등장하기 시작...

오다 카즈마사

널 보고 있으면

* 강산에 노래.   * 서울역에 노숙자가 있다고 하자. 구원은 그를 삶의 결단으로 이끄는 일이지만, 연대는 노숙자에게도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그가 노숙자가 되기까지 더 많은 안전망이 작동하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그 노숙자의 인격이나 믿음과 상관없이 말이다    단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모든 이들과 연대하는 것보다 덜 가치 있거나, 더 손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머 말도 안되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연대하거나, 아니면 단 한 사람만을 구원할 수 있거나...이 두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두를 구원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예수는 묵시문학의 비유를 통해 각 개별자들을 실존적 결단으로 이끌려고 했다. 모두를 대속해 십자가에 매달린 일은 그의 의지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나는 단 한 사람의 구원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에 값한다고 생각한다.    시몬느 베이유는 옷을 참 못입었는데, 보봐르가 베이유를 만난 자리에서 참 옷을 못입는다고 그랬다고 한다. 보봐르의 인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베이유는 그 글이든, 인생이든 참으로 성스러운 삶을 살다가 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는 반동이었다. 파스칼이 그랬고, 우치무라 간조가 그랬다. 보봐르의 인격이 훌륭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베이유보다 진보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민중신학의 쇠퇴는 단순히 남한 교회의 부패 때문만은 아니다. 연대에 대한 신념과 구원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을까, 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이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화입마

* 책 읽기를 멈추면 주화입마.....하게 된다. 내가 책을 읽는 건, 내가 나로 끊임없이 환원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다. 그래서 주화입마가 뭐냐하면, 내가 타자와 나 사이의 차이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의 자기 확인을 반복하는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기획이다. 내가 나를 추인하고, 금지하고....내가 나를 북치고 장구치는 일이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체가 구성하는 '나'가 어떤 이유에선지 주체가 호명할 수 없는 곳에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엉뚱한 곳에 구성된 '나'는 주체가 스스로를 외상과 격리시키기 위해 구성한 '나'이다. 주체는 이 '나'가 주체가 아닌, 외상이 구성했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주체와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알리바이들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러니까, 관계없음을 증명할 증거를 만든다는 것인데....   * 뱀파이어는 거울에 보이지 않는다. 거울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자아 이상'의 단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자아'를 구성하지 않는 주체다. 당연히 자아를 갖지 않는 주체는 상징 질서에 편입할 방법이 없으며, 타자와의 차이를 생산해낼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고유성이 아니라, 무한 반복되는 자기 동일성의 지옥이다. 결국 성적 주체의 공포란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성적 환타지의 뒷면. 라캉의 성관계란 없다,는 선언은 뱀파이어들을 햇빛에 내놓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봐도 훌륭한 애니 뱀파이어D에서 인간을 사랑한 뱀파이어가 햇볕에 자신을 내놓은 장면은 그래서 욜라 라캉적이다....   * 숭고는 실재의 도래를 가장한 것이다. 좀비를 보라.

숭고 III

* 리얼리티를 거머쥐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바르트가 푼크툼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우발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것이다. 하이퍼 리얼리티는 리얼리티라고 상정된 것을 세밀화하는 방법으로, 리얼리티로부터 달아난다. 실재가 도래하는 통로를 이미지로, 스크린으로 겹겹이 필터링 하는 것이고, 이미지를 완전히 통제해 우발성의 자리를 최소화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직관이란 것은 통념과 같이 인과나 논리를 무시한, 신비로운 감각이나, 초월적 이성이 아니다. 직관은 이와 같은 수많은 필터, 이미지를 걷어낸 직접성이며, 우발성을 통해 도래하는 실재를 수긍하고, 추인하는 일이다. A는 Z다. A가 B이고, B가 C이고, C가 D이고..마침내 Z가 된다는 인과의 연쇄는 저 하이퍼 리얼리티의 방법처럼, A를 향해 도래하는 Z를 방해하고, 지연시키려는 행위다. A에 Z가 도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과가 시작된다는 것이 리얼리티가 아닐까. 우발성은 결국 Z의 도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이 Z의 도래를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때, 숭고는 A를 완전히 폐기한다....어떤 식으로 폐기하게 될까.....

호모루덴스는 멸종하지 않아! 않는다규!!

* 언니라는 말은 참 좋다. 아큐라 언니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월호에 올린 글이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쫌 놀려 먹었는데 ㅋ 암튼 글쟁이 데뷔작인 셈인가. ㅎㅎ     호모루덴스는 멸종하지 않아 -놀이네트(놀이운동가)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하위징아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 놀이 ’ 고 , 놀이라는 바탕 위에 인간의 문명이 세워졌다 . 1938 년 출판된 < 호모루덴스 > 에 이러한 통찰이 담겨 있다 . 그러나 통념상 놀이는 문화의 하위 영역이다 . 개인의 삶에서 노동 또는 학업과 휴식 사이에 겨우 존재하며 , 재미는 있지만 별다른 목적과 가치가 없는 활동이 바로 놀이다 . 통념은 힘이 세며 일정한 진실을 반영한다 . 우리는 재미없이 살고 있으며 우리 삶은 , 놀이가 그러하듯 , 어떤 목적을 위하지 아니한다 . 놀이는 매우 자명하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활동이지만 , 아직은 인간의 언어로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복잡한 과정과 원리를 가진 실체다 . 놀이는 에브리싱 (Everything) 인 동시에 낫싱 (Nothing) 인 그 무엇이며 , 일상 속 복잡계이다 . 놀이라면 당연히 전래놀이라는 선명한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하면 선명하지 않은 현실과 부합하기 어렵다 . 극단의 여러 관점을 동시에 긍정해야 한다 .         과연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놀지 않는가 ? 답은 만만치 않다 . 놀이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 우선 놀이는 자유일 수 있다 . 놀이의 반대는 ‘ 억압 ’ 이 된다 . 우리 아이들은 오직 공부할 자유만 있어 내전 중인 나라나 극히 빈곤한 나라의 아이들만큼 심각한 ‘ 놀이실조 ’ 상태다 . 놀이를 성인기의 준비로 보는 관점도 있다 . ‘ 어려서 놀며 기른 힘 ’ 으로 ‘ 세상의 벽과 사회에서 받을 상처 ’ 를 넘거나 치유하게 된다 . 그렇다면 산과 들 , 골목에서 뛰노는 것도 놀이요 , 공부...

간만에 제시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