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조선 운동사 리뷰라고 할 수는 없지만...

http://yhhan.tistory.com/trackback/1311 1. 설국을 읽다가 나는 내 머리가 얼마나 나쁘고 문학을 얼마나 잘 모르는지 깨달았다. 알튀세르와 라캉, 벤야민을 읽으면 나의 나쁘고 못된 머리와 문학에 대한 무지의 수위가 낮아질 것 같아서 이들을 먼저 읽으려고 했는데, 결국엔 안티조선운동사를 가장 먼저 읽었다. 그 이유는 '알튀세르와 라캉'이라는 책의 번역 수준이 아무래도 개똥 같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고, 벤야민의 책들은 아주 긴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안티조선운동사를 집어든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의 저자인 한윤형씨가 신문지상과 블로그를 통해 보여주는 일련의 문제의식들이 매우 나의 흥미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식이 무엇이냐면 한 마디로 공공성과 당파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2.   http://yhhan.tistory.com/trackback/1299  한윤형씨가 블로그에 올린 '정치 평론에서의 초월적 논증'이란 글이다.  글의 내용을 짚어보자. "최장집(+진보신당) : 한국에 복지국가가 오지 않는 이유는 노조조직률이 10%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조직률이 높아지지 않으면 복지국가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복지국가 담론에 파묻히기 전에 노조조직률 확대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이상이 : 노조조직률이 10%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국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조직의 강화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조조직률 문제를 따지기 전에 일단 복지정책 프로세스를 갖춘 정당이 집권하여 복지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 상반된 인과관계 속에서도, "B가 불가능하니 A가 답"이란 초월적 논증이 횡행하지 않는가? - 한윤형" 한윤형씨가 초월적 논증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아래와 같은 글에서 실천적 영역에 있어 심리학의 문제라고 호명하...

다 못읽었다.

* 설국을 아직 다 못읽었다. 중간에 부코우스키를 읽느라 그랬다. 알튀세르와 라캉을 다 못읽었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다 못읽었다. 알튀세르와 라캉을 읽느라, 벤야민을 읽느라 그랬다. 벤야민을 다 못읽었다. 중간에 갑자기 안티조선운동사를 읽느라 그렇게 되었다.  거기다가 어제는 또 라캉의 주체...라고 브루스 핑크 아저씨가 쓴 책을 또 덥석 사들였다. 매우 읽고 싶지만, 알튀세와 벤야민과 설국과 안티조선운동사 때문에 참는다. 아 그냥 들어앉아서 책만 들입다 읽고 싶다. 나는 이러다가 한 두 달 쯤 지나서 책을 다 읽게 된다. * 꼬뮤니스트라고 부른다. 우파와 좌파, 진보와 보수의 모호한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 말이다. 꼬뮤니스트. 다시 말하지만, 연대의 가능성과 그 미래에 대한 존중 없이는 꼬뮤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벤야민

* 벤야민 아저씨를 읽고 있는데, 일단 번역이 그야말로 기계적 번역이라 좀 그렇다. 두번째는 이 아저씨는 철학자나, 인문학자이기 전에 문예 비평가라서 꼬집어 말하는 법이 잘 없다. 글쓰기의 강박으로부터 놓여난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또 반대로 글쓰기의 강박은 또 어떤 것일까. 벤야민 아저씨 같은 이들은 그 정치적 편향과 관계없이 글쓰기의 강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소위 '교양'이라는 걸 채워놓은 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다시 강박이란 무엇인가? 근데, 대부분의 교양이 사적 유물론이 아니라, 역사주의에 함몰되기 쉽상이고, 그 최선의 표현이 역사의 단선적인 진보라고 할 때 그는 단연코 교양인에 머물지는 않았다, 고 나는 믿는다...

사디즘과 히스테리, 유물론과 선재성

* 새디즘은 히스테리증자의 깨진 거울상이다. 히스테리증자가 새디스트를 요청하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데 몰두하는 히스테리증자에게 새디즘은 히스테리증자 자신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거의 유일한 어떤 것인지이면서 동시에 히스테리증자의 탄생을 이끌어낸 '깨진 거울상'의 현현이기도 하다. 새디즘은 히스테리증자가 깨진 거울을 복구하지 않고도,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히스테리증자의 합리 구조를 기준으로 말하면 그렇다. 때문에 사디즘과 매저키즘이라는 묶음은 심리학적 관점은 될 수 있어도, 정신분석의 논리 안에서는 보충설명이 필요한 구분일 것이다.   * 알튀세르는 유물론의 최소정의를 의식의 외부에 현실이 존재한다는 테제라고 말한다. 라캉은, 비슷한 말이지만 의식의 외부에 현실이 '먼저' 존재한다고 말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를 빌려와 유물론적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말은 라캉을 빌려와 말했더라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의식 이전에 존재하는, 자아 이전에 존재하는 언어적 현실 말이다. 라캉의 '선재성'은 유물론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가 우발성의 유물론, 혹은 해후의 유물론으로 변화해가는 이유는 라캉의 관점에서 보아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현존재가 세계의 선재성 앞에서 자신의 기투성을 깨닫는 일이 보편적 존재론의 출발이라고 하면.....인식론의 존재론적 전환....그 사이에 유물론이 있고, 또 헤겔이 있는 거다.

거짓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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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데이빗슨 이야기는 아니다. 평범하게 사는 일이 더 힘들고 값진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이야기다. 거짓말이잖아, 맹목적이잖아! 눈이 가렵다. 원래 나는 온 몸이 눈이었다.

알튀세

* 알튀세 아저씨는 머 나한테는 그냥 라캉 친구다. 아직 더 자세히 읽지 못해서 그렇지만. 그리고 아마도 좀 더 있으면 둘이 분화하는 첨예한 지점들이 나타나겠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라캉을 좀 들여다본 덕에 조금 수월하게 읽어내려가고 있다. 라캉-알튀세-(발리바르)-들뢰즈....뭐 대충 이정도 지도로 당분간 헤맬 듯. 메를로 퐁티의 정치 평론을 읽다가 걍 접었다. 머 굳이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요즘은 아부지한테 이틀 걸러 한번씩 전화를 드린다. 주위 친구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들이 들려서 안부 겸 전화를 드리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 호방한 남자같지만 또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는 남자이기도 하다.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 요즘 이연주의 시집을 매일 매일 갉아먹고 있다. 새벽 두시. 나는 노오란 핸드 랜턴 불빛에 의지해서 이연주를 읽어 내려간다. 위악이라고? 실천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시도를 그렇게 부르는 건 '이미지'가 작동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미지는 작동하잖아? 어떻게? 단절을 매개로! 못박음을 시작으로!! 매음녀의 이미지는 히스테리증자가 시도하는 인식론적 단절의 시도다. 매음녀의 이미지를 불러내는 주체는 히스테리적 망치질을 시도하는 것이다.  히스테리 주체는 기본적으로 타자의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 실패한, 그래서 타자의 질서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주체다. 그래서 그는 그 의심에 사로잡히기 전에 더 강력한 타자의 질서를 요청한다. 그는 타자의 욕망을 강화하고, 그 스스로 그 욕망에 합당한 대상이 됨으로써 이를 추인받고자 하는 주체다. 매음녀의 이미지는 이와 같은 히스테리 주체의 구조와 닮아 있다. 그러나 히스테리 주체는 매음녀의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를 불러내지만, 실천의 영역까지는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돈으로 교환되는 매음녀는 결정적으로 '교환불가능성'이라는 히스테리 주체의 존재론적 질문, 그 강박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히스테리 주체의 탄생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존재가 주체에게 묻는 '교환가능/ 불가능'의 질문의 반복과 강박일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많은 질서들이 '자본주의 전략'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히스테리 주체는 상징적 차원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일 수도, 또 가장 非자본주의적인 예외적 존재일 수도 있는 주체다.....

구체적 구체적

* 블로그가 자동으로 이전되었다.  겨울이다. 내 머릿 속에는 단백질로 만든 폭탄이 들어 있다. 당분간은 좀 과장 같더라도 그런 생각으로 살아야겠다.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임석진 선생, 아니 헤겔의 '정신 현상학', 레닌 평전2, 최재희 선생 번역의 순수이성 비판과 백종현 선생 역의 실천이성 비판....내가 연말에 아마도 사들이게 될 책들이다. 아 젠장 헤겔은 언젠가는 보게 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냥 안보고 넘어갔으면 하는 책이기도 했다. 1. 제임스 낙트웨이라는 전쟁 사진가의 다큐를 본다. 전쟁 사진가....아니, 그냥 그도 전쟁의 일부이다. 전쟁의 모든 것이 악하지는 않다. 모든 전쟁은 악하지만, 전쟁의 모든 것이 악하지는 않다. 어쩌면 우리가 전쟁을 결코 없앨 수 없다면, 되도록이면 가장 덜 고통스러운, 덜 악한 전쟁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나는 차가운 낙관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2. 그러나 나는 영원을 목격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전쟁을 결코 없앨 수 없다는 말은 나의 도피처에 가깝다. 논증할 수 없는 말이며, 사실이 아니라 가치 판단에 불과하다. 나에게 구체적이라는 말은 그래서 논증할 수 없는 영원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일 것이다.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방법이 있다면 오로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명제 뿐이다. 구체적인 모든 것은 언뜻 재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재현은 영원에 복무하기 위한 강박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것은 한번도 재현적이었던 적이 없다.

테스트

졸리네

자유냐, 목숨이냐

* 자유냐, 목숨이냐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질문에는 자유와 목숨, 두 가지가 다 가능한, 이를테면 공통분모를 제거한다는 전제가 은폐되어 있다. 자유를 선택하면 목숨이 없는데, 목숨이 없는 자유는 불가능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 은폐된 공통분모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는 중요한 문제다. 그 공통분모가 자유냐 목숨이냐의 이분법 내부의 교집합에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유냐 목숨이냐라는 질문 전체의 바깥, 그 예외적 존재로 볼 것인지는 사유 전체의 중요한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저 중요한 갈림길의 존재를 나한테 알려준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는 저 두 길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이해한 라캉은 그렇다. 그는 타인의 모순을 지적할 때는 그들의 이분법 내부의 교집합과 그 어두운 단면인 섹터주의를 비판하지만, 그러나 실재의 도래가 저 예외적 존재로부터 오는 것인지, 은폐된 교집합의 장에서 일어나는 돌발인지를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공부가 부족한 것이기도 하겟지만...    내가 들뢰즈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이유는 저 갈림길의 존재가 선명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보신당과 민노당이 다시 합당 논의에 들어갈 것 같다. 합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연합. 좌파들은 저 둘 내부의 은폐된 공통분모, 혹은 폐쇄된 섹터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들 바깥의 돌발적 예외가 될 것인가.....여기까지가 금요일 밤 문득 내가 생각한 내용이다. 친구와 친구의 애인과 그 애인의 친구들과 어쩌다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친구 애인 왈 친구 가운데 A양과 B양 중 누가 더 이쁘냐는 거다.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생각이 내달렸다.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기관차처럼 자유냐, 목숨이냐부터 진보신당의 좌파들 생각까지. 피곤하면 생각이 내달린다. 머 한 마디도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전두엽 장애인가, 싶었다.   * 아니 시발 그럼 통닭 배달하는...

또 눈왔다

* 또 눈이 왔다. 이번에는 후둑후둑 함박눈. 날이 추워서 아침에는 잠깐 길에 쌓여 있다 녹았다가, 지금 다시 눈온다. 눈이 오면 나는 생각한다. 아니 생각이 저 혼자 선명하다. 내가 생각을 통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조바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눈온다. 당신 생각이 저 혼자 또렷하다.   * 들었던 노래를 또 듣기도 한다.  

구름

* 자연이 좋다, 숲이 좋다, 그런 이야기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숲도 좋고, 나무도, 풀도, 꽃도 좋다. 그런데, 우리가 숲을 좋아하는 이유가 숲과 나무가 측정할 수 없는 신비를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사실에는 반대한다. 내가 겪은 숲, 내가 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발성이 그곳을 지배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숲에서 우발성에 대해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발적이고, 가시적인 현상은 구름이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안 구름은 그야말로 원형을 가지지 않는 '현상' 그 자체다. 나는 '나'라는 우발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를 원한다. 대부분의 '나'는 일종의 기시감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발견이지만 구름이야말로 그 발견의 바깥을 보여준다.....'나'라는 관성은 원형을 가졌다는 환상이 없다면 그져 일종의 접촉점에 지나지 않는다. 구름은 흩어지는 동안에도, 다시 모여 구성되는 동안에도 구름으로 호명된다. 감각적 실존의 차원은 우발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건 그거구. 나는 알고 보면 감정이 잘 일어나지 않는 타입이다. 냉정한 건 아닌데, 감정의 계기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사실 감정이라는 건 일정한 계기 그 자체가 불러오는 게 아니라, 그 계기들이 어떤 저항을 통과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한테는 그 저항이 없다. '나'라는 기시감 같은 게 잘 없는 거다. 그런데, '나'의 구성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즉 그 기시감의 정체는 타인들이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으므로....근데, 이 기사감을 깨뜨리는 존재가 나타나면 '나'는 비로소 저항을 통과하는 것이다.     * 이택광 아저씨로부터 촉발된(?) 라캉주의 논쟁(?)을 보고 있자니 이건 뭐...지나치게 한심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논쟁 주위로 모여드는 수많은 이상한 사람들의 논란보...

크리스마스에 대하여

*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는 12월 26인가? 입대했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의 제대날짜는 2월. 복무기간은 26개월이었다. 그치만 크리스마스는 나의 제대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므로 군복무 말기에 나는 지상의 모든 크리스마스 캐롤을 듣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제대 6개월 정도를 앞두고 내가 소속된 부대는 동해안에 철책을 다시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장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분대원들에게 그날의 크리스마스 캐롤 합창을 시켰다. 왜냐하면, 나의 크리스마스는 나의 제대를 위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나는 분대장이었으니까.   아무튼 나의 크리스마스 캐롤에는 차가운 바닷바람과 작업장에서 돌아오는 젊은 군인들의 노랫소리와 해 떨어지는 해안선의 가파른 풍광이 들어 있다.  

퇴근길의 호로비츠

* 적당히 추웠다. 퇴근 길에 호로비츠를 듣는다. 퇴근길에 듣는 음악들은 내가 사실 얼마나 허약한 욕망을 가졌는지, 스스로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날이 적당히 춥고 호로비츠를 듣고 있으니 머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원하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예외자로, 혹은 이방인으로 머무는 시간들이 가장 온전하다. 내가 글쓰기를 쉽게 그만둘 수 있었던 것도, 또 쉽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도, 또 그것과 결별하는 일에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요컨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한정된 자유 안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예외자를 손쉽게 정의하자면 뭐 그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눈온다

* 헤겔 철학은 잘 모르지만, 그를 씹어 삼켜본 적은 없어도 길고 긴 혓바닥으로 햝아본 적은 있으므로...헤겔주의자에게 '예외적 주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쿵짝쿵짝. 눈이 온다. 헤겔에게 세계를 정의내리는 일자는 존재할지 몰라도, 수많은 다양한 재정의와 해석이 가능한 '예외적 존재'가 가능할 리가 없다.   * 헤겔 월드에는 종교나 초월적 일자는 존재할 수 있지만, 예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헤겔의 일자는 세계 내로 도래할 수 없다. 세계와 일자 사이에 인간은 그 둘을 매개하는 유한한 현상일 것이다. 예수와 같은 매개가 필요도 없고, 또 그에 의한 일종의 재해석이 필요하지도 않다는 거다.   * 헤겔은 안녕, 눈이 온다. 늦게 일어났는데, 눈이 무지 많이 올 거라는 기상 예보로 인해 도로에 차가 없고, 택시는 씽씽. 지각은 했지만, 굉장히 빨리 회사에 도착했다. 새벽에 잠깐 깨었는데, 눈이 안왔더랬다. 담배 피우면서 최승자 시인 생각을 잠시 했다. 좋아하긴 하지만 머랄까 다르다. 어떤 시들은 좌표만 겨우 가늠될 뿐, 감각적으로 나와는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가깝다고 더 좋은 시라는 건 아니고.....최승자에게는 자신의 세계가 있지만, 어떤 섹터가...없다...섹터라는 게 나쁜 뜻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친밀한 세계이고, 또 한편으로 눈 먼 내가 머무는 세계, 만지지 않고는 알 수 없고, 만질 수밖에 없는 세계.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고, 강박이 아니지만 떼어낼 수도 없는 뭐 그런 거 말이다.   * 음. 원래 섹터의 지식인들은 머리가 짧아야 옳다. 빡빡 밀었다.    

금지와 소외

* 그러므로 소외는 '금지'안으로 편입하기 위한 절차라는 거다. 통과의례라는 말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금지라고 해서, 금기나 통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금지'는 타자가 이루어놓은 질서, 체계의 전체를 지칭하는 상징적 용어라고 해야 맞다. 타자의 질서 전체를 '금지'라는 말로 굳이 대표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금지가 미끄러지는 질서의 연쇄를 못박아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고정되지 못한 체계는 미끄러진다.    뭐 이를테면 '남자'라는 시니피앙이 지시하는 것이 고정돼 있지 않다고 가정해보자. '남자'가 다리미를 지시하거나, 남자가 벽돌을 뜻하거나, 고양이를 뜻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체계는 '의미화'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 의미화가 불가능하면? 자아의 생성 같은 일은 없는 거다. '의미'라는 건 별 것이 아니다. 자아는 저 질서, 그러니까 타자들의 체계에 편입되어 생기는 일종의 피드백과 같은 현상이다. 자아 역시 타자들의 체계에 소속되어 체계 전반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 받기도 한다. 요컨대,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이 '피드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반대로 감정의 탈락, 배제 만큼 이 '피드백'의 접촉불량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저 질서의 체계 안으로 편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거나, 실패하였다면 어떤 전략을 선택하게 될까. 그 한가지는 자발적 소외이고, 그 두번째는 일종의 히스테리적 자아의 소환이다. 그 두가지는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뭐 사실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에서 당신이 저  질서의 체계 안에 초대받지 못했다면,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소외'의 절차를 다시 한번 거쳐 '질서' 안에 편입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저 ...

차이, 들뢰즈, 초월, 타나토스..

* 라캉 다음에는 알튀세를 읽으려고 했는데, 들뢰즈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니, 들뢰즈 입문서부터....근데, 들뢰즈의 말처럼 초월이든, 팔루스든 머 물론 라캉도 이에 대한 회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들뢰즈의 말처럼 일원론이 없다면, 타나토스도 없다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그러니까 차이의 체계가 일원론을 형성한다는 해석보다는, 실재, 타나토스 머 이런 것이 일원론을 형성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 구태의연한가. 음...나는 라캉의 '실재'가 일원론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 그리고 호로위츠의 라흐마니노프 듣고 있는데, 참 좋구나.   *  

전쟁, 전쟁, 전쟁

* 그건 전쟁이라서, 현실의 정치적 함의 같은 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이겠지.   * 글을 쓰는 건 좋은데, 그냥 몽롱하니 받아적고 싶다. 내가 원하는 글쓰기의 원형이 그런 것인데, 그곳으로 가기가 쉽지가 않다. 몽롱해도 할 건 다 한다. 저항도 하고, 도약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고.

자발적 소외 / 계급의식이라는 환상 - 한밤중 수정- 두번째

* 원래 소외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 혹은 근대적 주체가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도 하지만.....주체는 기투된 존재인 이상 주어진 질서, 즉 타자의 장에서 구성되고 정의될 수밖에 없다. 또 그와 같은 소외의 과정 없이는 어떠한 자기 확인의 절차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물화와 상품의 물신화는 역사적으로는 근대화의 과정으로 옮아가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인간의 사회화가 진행되는 보편적인 과정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전존재와 항상 조우하면서 살 수 없다. 그가 사회적으로 조우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결여된 주체로써, 소외의 절차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질서에 복무하고, 갈등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들뢰즈는 저 결여를, 존재를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없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기 위한 장치 말이다. 들뢰즈 공부는 모자라서 여기까지..)    그러니까 소외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주체가 타자의 질서에 소속되기 위한 절차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자아 실현'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실현'이 될 수 없다는 소외의 차원과, 보편적 사회화를 표현하는 적확한 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결정적으로 소외는 주체가 소외를 통해 만나는 질서 너머의 무엇과 조우하기 위한 대책없는 열망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외의 과정, 존재에서 자아로의 전환 과정은 비자발적 절차, 혹은 언어적 질서에 의해 강제된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강제'가 결핍되거나, 훼손되면 당연히 주체는 '비자발적 소외'의 과정 대신 '자발적 소외'의 절차를 불러들이게 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바로 이와 같은 비자발적 소외, 언어적 질서로의 편입을 위한 강제의 과정이다. 어머니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금지를 통해 '주체'로부터의 소...

논리적 시간

* 통시적/ 공시적 관점의 구분은 시간의 자연적 흐름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내러티브를 구성하느냐, 아니면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인과와 논리에 따라 이를 구성하느냐의 차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 논리적 시간은 통시적으로 확정된 내러티브를 일정한 지향을 가진 논리와 인과를 통해 재구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논리적 시간은 공시적으로 재구성된 내러티브를 마치 '통시적 관점'인 양 묘사하고 표현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이를테면 출고된지 며칠 안된 신형아반떼가 갑자기 발화돼 불에 타버린 뉴스를 예로 들어보자. 사건 운전자의 가족이 이 이야기를 인터넷에 퍼뜨려 많은 이들이 해당 사건을 알게 되었는데, 통시적 시간은 발화 사건이 먼저이고, 인터넷에 소식을 전한 것이 그 이후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논리적 시간에 이 운전자가 매몰되었다고 가정하자. 운전자는 가족이 인터넷에 루머를 만드는 잘못된 습관 때문에, 차에 발화가 되었다는 식으로 이 사건을 구성하고 묘사한다. 그리고 가족을 비난한다.     여기에는 분명한 '지향'이 있다. 그리고, 이 지향은 대개 통시적 관점을 비틀어줌으로써 내러티브의 '공시적 관점' 즉 논리와 인과를 완전히 휘발시키려는 의도를 가진다. 위에 만든 이야기는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는 사실 아주 많은 경우에 이와 같은 '논리적 시간'을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살아내고 있다. 위 이야기의 지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같은 '논리적 시간'으로 재구성된 내러티브의 수혜자가 누군지를 잘 알 수 있다. 신형아반떼를 만든 회사일 것이다. 또 운전자는 가족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명확한 결론이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논리적 시간'이 보여주는 지향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고, 그 지향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파악하기는 더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