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의 호로비츠

* 적당히 추웠다. 퇴근 길에 호로비츠를 듣는다. 퇴근길에 듣는 음악들은 내가 사실 얼마나 허약한 욕망을 가졌는지, 스스로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날이 적당히 춥고 호로비츠를 듣고 있으니 머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원하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예외자로, 혹은 이방인으로 머무는 시간들이 가장 온전하다. 내가 글쓰기를 쉽게 그만둘 수 있었던 것도, 또 쉽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도, 또 그것과 결별하는 일에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요컨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한정된 자유 안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예외자를 손쉽게 정의하자면 뭐 그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눈온다

* 헤겔 철학은 잘 모르지만, 그를 씹어 삼켜본 적은 없어도 길고 긴 혓바닥으로 햝아본 적은 있으므로...헤겔주의자에게 '예외적 주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쿵짝쿵짝. 눈이 온다. 헤겔에게 세계를 정의내리는 일자는 존재할지 몰라도, 수많은 다양한 재정의와 해석이 가능한 '예외적 존재'가 가능할 리가 없다.   * 헤겔 월드에는 종교나 초월적 일자는 존재할 수 있지만, 예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헤겔의 일자는 세계 내로 도래할 수 없다. 세계와 일자 사이에 인간은 그 둘을 매개하는 유한한 현상일 것이다. 예수와 같은 매개가 필요도 없고, 또 그에 의한 일종의 재해석이 필요하지도 않다는 거다.   * 헤겔은 안녕, 눈이 온다. 늦게 일어났는데, 눈이 무지 많이 올 거라는 기상 예보로 인해 도로에 차가 없고, 택시는 씽씽. 지각은 했지만, 굉장히 빨리 회사에 도착했다. 새벽에 잠깐 깨었는데, 눈이 안왔더랬다. 담배 피우면서 최승자 시인 생각을 잠시 했다. 좋아하긴 하지만 머랄까 다르다. 어떤 시들은 좌표만 겨우 가늠될 뿐, 감각적으로 나와는 멀리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가깝다고 더 좋은 시라는 건 아니고.....최승자에게는 자신의 세계가 있지만, 어떤 섹터가...없다...섹터라는 게 나쁜 뜻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친밀한 세계이고, 또 한편으로 눈 먼 내가 머무는 세계, 만지지 않고는 알 수 없고, 만질 수밖에 없는 세계.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고, 강박이 아니지만 떼어낼 수도 없는 뭐 그런 거 말이다.   * 음. 원래 섹터의 지식인들은 머리가 짧아야 옳다. 빡빡 밀었다.    

금지와 소외

* 그러므로 소외는 '금지'안으로 편입하기 위한 절차라는 거다. 통과의례라는 말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금지라고 해서, 금기나 통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금지'는 타자가 이루어놓은 질서, 체계의 전체를 지칭하는 상징적 용어라고 해야 맞다. 타자의 질서 전체를 '금지'라는 말로 굳이 대표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금지가 미끄러지는 질서의 연쇄를 못박아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고정되지 못한 체계는 미끄러진다.    뭐 이를테면 '남자'라는 시니피앙이 지시하는 것이 고정돼 있지 않다고 가정해보자. '남자'가 다리미를 지시하거나, 남자가 벽돌을 뜻하거나, 고양이를 뜻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체계는 '의미화'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 의미화가 불가능하면? 자아의 생성 같은 일은 없는 거다. '의미'라는 건 별 것이 아니다. 자아는 저 질서, 그러니까 타자들의 체계에 편입되어 생기는 일종의 피드백과 같은 현상이다. 자아 역시 타자들의 체계에 소속되어 체계 전반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 받기도 한다. 요컨대,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이 '피드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반대로 감정의 탈락, 배제 만큼 이 '피드백'의 접촉불량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저 질서의 체계 안으로 편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거나, 실패하였다면 어떤 전략을 선택하게 될까. 그 한가지는 자발적 소외이고, 그 두번째는 일종의 히스테리적 자아의 소환이다. 그 두가지는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뭐 사실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에서 당신이 저  질서의 체계 안에 초대받지 못했다면,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소외'의 절차를 다시 한번 거쳐 '질서' 안에 편입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저 ...

차이, 들뢰즈, 초월, 타나토스..

* 라캉 다음에는 알튀세를 읽으려고 했는데, 들뢰즈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니, 들뢰즈 입문서부터....근데, 들뢰즈의 말처럼 초월이든, 팔루스든 머 물론 라캉도 이에 대한 회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들뢰즈의 말처럼 일원론이 없다면, 타나토스도 없다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그러니까 차이의 체계가 일원론을 형성한다는 해석보다는, 실재, 타나토스 머 이런 것이 일원론을 형성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 구태의연한가. 음...나는 라캉의 '실재'가 일원론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 그리고 호로위츠의 라흐마니노프 듣고 있는데, 참 좋구나.   *  

전쟁, 전쟁, 전쟁

* 그건 전쟁이라서, 현실의 정치적 함의 같은 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쟁이겠지.   * 글을 쓰는 건 좋은데, 그냥 몽롱하니 받아적고 싶다. 내가 원하는 글쓰기의 원형이 그런 것인데, 그곳으로 가기가 쉽지가 않다. 몽롱해도 할 건 다 한다. 저항도 하고, 도약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고.

자발적 소외 / 계급의식이라는 환상 - 한밤중 수정- 두번째

* 원래 소외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 혹은 근대적 주체가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도 하지만.....주체는 기투된 존재인 이상 주어진 질서, 즉 타자의 장에서 구성되고 정의될 수밖에 없다. 또 그와 같은 소외의 과정 없이는 어떠한 자기 확인의 절차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물화와 상품의 물신화는 역사적으로는 근대화의 과정으로 옮아가는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인간의 사회화가 진행되는 보편적인 과정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사회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전존재와 항상 조우하면서 살 수 없다. 그가 사회적으로 조우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결여된 주체로써, 소외의 절차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질서에 복무하고, 갈등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들뢰즈는 저 결여를, 존재를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없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기 위한 장치 말이다. 들뢰즈 공부는 모자라서 여기까지..)    그러니까 소외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주체가 타자의 질서에 소속되기 위한 절차인 셈이다. 우리가 흔히 '자아 실현'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실현'이 될 수 없다는 소외의 차원과, 보편적 사회화를 표현하는 적확한 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결정적으로 소외는 주체가 소외를 통해 만나는 질서 너머의 무엇과 조우하기 위한 대책없는 열망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소외의 과정, 존재에서 자아로의 전환 과정은 비자발적 절차, 혹은 언어적 질서에 의해 강제된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강제'가 결핍되거나, 훼손되면 당연히 주체는 '비자발적 소외'의 과정 대신 '자발적 소외'의 절차를 불러들이게 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바로 이와 같은 비자발적 소외, 언어적 질서로의 편입을 위한 강제의 과정이다. 어머니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금지를 통해 '주체'로부터의 소...

논리적 시간

* 통시적/ 공시적 관점의 구분은 시간의 자연적 흐름으로 사건을 서술하고, 내러티브를 구성하느냐, 아니면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인과와 논리에 따라 이를 구성하느냐의 차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 논리적 시간은 통시적으로 확정된 내러티브를 일정한 지향을 가진 논리와 인과를 통해 재구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논리적 시간은 공시적으로 재구성된 내러티브를 마치 '통시적 관점'인 양 묘사하고 표현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이를테면 출고된지 며칠 안된 신형아반떼가 갑자기 발화돼 불에 타버린 뉴스를 예로 들어보자. 사건 운전자의 가족이 이 이야기를 인터넷에 퍼뜨려 많은 이들이 해당 사건을 알게 되었는데, 통시적 시간은 발화 사건이 먼저이고, 인터넷에 소식을 전한 것이 그 이후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논리적 시간에 이 운전자가 매몰되었다고 가정하자. 운전자는 가족이 인터넷에 루머를 만드는 잘못된 습관 때문에, 차에 발화가 되었다는 식으로 이 사건을 구성하고 묘사한다. 그리고 가족을 비난한다.     여기에는 분명한 '지향'이 있다. 그리고, 이 지향은 대개 통시적 관점을 비틀어줌으로써 내러티브의 '공시적 관점' 즉 논리와 인과를 완전히 휘발시키려는 의도를 가진다. 위에 만든 이야기는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는 사실 아주 많은 경우에 이와 같은 '논리적 시간'을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살아내고 있다. 위 이야기의 지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같은 '논리적 시간'으로 재구성된 내러티브의 수혜자가 누군지를 잘 알 수 있다. 신형아반떼를 만든 회사일 것이다. 또 운전자는 가족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명확한 결론이 보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논리적 시간'이 보여주는 지향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고, 그 지향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파악하기는 더 어렵다.   *

회복기

 * 꿈이란 꿈에 죄다 옛날 사람들이 나온다. 전두엽에 뇌출혈로 손상된 뇌신경을 포기하고 새로운 통로를 만드느라 그런 것이란다. 창고로 가는 새로운 길을 만드느라 뚝딱뚝딱 전두엽이 바쁜 거다. 잠만 자면 온갖 옛날 사람들이 나와서 시끄럽기는 또 왜 그렇게 시끄러운지. 끙.   * 이것두 손상된 전두엽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자유주의야말로 전위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전위라는 건 무엇일까. 나는 그곳이 최첨단이기전에 인간의 내장을 환하게 보여주는 최전선이라고 생각한다. 계급의식은 인간의 내장이 아니라, 내장을 들여다보거나, 혹은 뒤집어 꺼내 쏟아놓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스탕달이나, 파스칼 같은 이들의 글은 항상 나에게 경탄과 풀 수 없는 의심의 대상이었는데...../ 코기토가 아니라, 욕망이라는 테제에 이끌려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마음의 역동성, 불안의 반복을 설명할 때 '방어'라는 말 대신 '저항'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백번 옳다. 저항은 전이와 쾌락, 괴로움을 한꺼번에 담아낸다.   * 내가 정말 사랑해 마지 않는 박광현    

사회생활의 끝

* 알콜알러지로 1년, 그리고 어느날 가을 술을 먹고 뇌진탕...전두엽을 다쳤다.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고....몸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이렇게 이제 그만 사회 생활이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또 돈이야 벌어야겠지만, 다른 일을 해야 할 상황이다. 서른일곱까지 아무 일없이 사회 생활을 해왔다는 것 자체가 더 신기하다.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싶긴한데 내년쯤이나 되어야 새로운 생황을 찾아낼 것이다.   * 도무지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잊을 수가 없다. 10년이나 잊어버리고 살려고 노력했는데 결론은 잊을 수가 없다는 거. 내가 가진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감각은 글쓰기에 대한 것 뿐이더라. 열일곱에 처음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고, 스무 해가 지났다. 아마도 글쓰기야 말로 나에게 진짜 이름을 정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진짜 이름? 나를 폭로할 이름 말이지...   * 왓비컴즈가 보여주는 것은 한 가지인데, 오리지널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언제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유저들이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리지널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정보 자체는 오리지널을 갖고 있지 않은 데이터 그 자체다. 그러므로 정보는 원형으로 돌아가거나 회귀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 스스로 구성되면서 오리지널 존재 유무와 아무런 상관없는 세계를 만들어 보여준다.    타블로가 스탠포드를 나왔냐,의 사실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학력'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한 유저들의 새로운 환타지이다. 대한민국의 학력, 인맥의 힘에 대한 불신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 정보들이 이것과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정보의 연쇄 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타블로의 학력은 무슨 종교인의 자기 존재 증명 같은 과정을 통해서 겨우, 얻어졌다. 그가 졸업했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보다 중요하게 작동한 것은, 그가 자신의 학력을 증명하는데, 완전히 우파적인 방법 이외의 것이 ...

빗속에서

  * 수퍼스타케이에서 존박이라는 미쿡청년이 이문세 노래를 부른다. 내가 좋아하는 빗속에서......   * 증상은 이미 무의식에 대한 해석이다. 전이는 분석주체의 무의식을 닫는 행위에 가깝다. 전이는 저항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무의식과 전이 사이의 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증상이 언어로 번역될 수 있을리 없다. 전이-저항이야말로 유일한 통로다. 반대로 말하면, 저항없는 전이, 가짜 전이는 주체의 의태에 불과하다.

라캉, 병, 졸고 있는 분석가

* 세미나 11을 다시 읽고 있다. 화장실에 갈때 들고 가서, 접힌 페이지를 다시 읽고 생각하고, 감탄하고.....내 알콜 알러지는 내 몸의 질서와 더불어 살기를 거부한 어떤 것일텐데...이것을 내 몸 바깥으로 완전히 몰아내고, 죽이고, 다시는 그 증상들이 틈입하지 않도록 내 몸을 단단히 무장하는 방법이 있을테고....아니면, 그것들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적절하게 타협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건강이란 건 어떤 병도 침입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과 적절하게 더불어 살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더군다나, 후자의 방법은 증상과 증상 아닌 것의 경계, 분리의 정책을 돌아보게 만들어 줄 것이다...   * 분석 주체가 편안하게 자신의 언어를 풀어놓을 수 있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분석가' 야말로 전이의 단계를 넘어 존재하는 분석가의 모습이 아닐까.   * 라캉이 시각적인 것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은 매우 매혹적이고, 또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들과 아주 의심할 여지 없이, 닮아있다. 메를로 퐁티를 한번도 읽어본 적은 없는데, 읽어봐야겠다. 그런데, 라캉이 성경에 등장하는 사악한 눈, 혹은 비정한(?) 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전적으로 성경에 있어 '시각 적인 것'은 '로고스' 즉 헬레니즘 전통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시각이야말로 보편적 왜곡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이라는 뜻일까.

점멸

* 길게 보면 나라는 현상(미야자와 겐지 식으로)은 그냥 작은 점멸에 불과하다. 멀리서 깜빡이는 불빛에 불과하고, 자체적으로도 실은 불연속적이고, 일관성 없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 낙차와 틈을 메우는 행위일까. 아니면, 그 낙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깜깜한 틈을 들여다보는 일일까. 라캉의 '응시'가 말해주는 것은 나의 일관성, 자기 동일성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마련된 장, 안에서만 유지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재밌는 게 너무 많네.

* 수요일마다 농구를 하는데, 오랫만에 미친듯이 달리니까 재밌다. 음 화요일까지 대략 87, 86 근처를 왔다갔다하는 체중이 수요일을 기점으로 84, 85를 왔다갔다 한다. 너무 오랫만의 농구라서 아직 심장과 관절이 적응이 덜 됐는지 비명을 지르는데, 것두 맘에 든다. 요즘은 또 술을 못먹으니까 딱 한잔, 딱 두잔 이렇게 먹는 경우가 많은데 술은 또 왤케 맛있나. 악. 그리고, office 라는 미드를 시즌 5까지 봤다. 어제는 운동하고, 새벽 5시까지 내리 시리즈를 보다가 두 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스타크에 다시 빠져서 주말에는 새벽까지 스타크 한 10번쯤 하면 한두번 이기는 정도 밖에 안되지만......데니스 루헤인의 탐정소설들로 여름을 다 보냈고, 요즘은 캘리니코스 아저씨 책들을 읽는 중.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노동계급에 친화적이지 않은' 생각들과 좌파들이 왜, 어떤 방식으로 화해할 수 없는지를 몸소 보여주신다. 가끔 캘리니코스 아저씨는 자본주의적, 아니 산업주의적 효율성과 합리성에는 친화적이지만,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데...흠....생각하게 만든다.

요즘 제일 많이 듣는

 

정치적 예수...

* 예수의 목숨을 원한 것은 빌라도가 아니라, 군중들이었다. 그 사실을 잊으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그들의 '선처'를 요청한 사실이 망각된다. 십자가가 정치범들을 처형하던 방식이라는 사실에 매달려 예수를 '정치범'으로 한정하면, 아주 아주 과학적으로 생각해도 역사적 예수가, 정치적 예수에 의해 왜곡되는 일이 벌어진다.   예수를 크던 작던 어떤 범주를 통해 설명하는 방식은 일종의 소거법일텐데, 소거법을 하려면 정치적 열정이나, 영성이 아니라, 존재의 불안을 댓가로 한 전적인 '의심' 이외에 방법이 없다. 바르트처럼 초월론으로의 복귀를 통한 변증신학이 있는가, 하면 폴틸리히 같은 이들의 고통스러운 의심과 불안에 철저한 변증신학이 있었다. B급 좌파 아저씨는 .......   실존적으로 보면, 이 의심의 철저를 통한 신앙의 길은 소거법의 길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야스퍼스가 그랬고, 키에르케고르가 그랬고, 틸리히가 조직신학을 만들어낸 길 또한 그랬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라는 개념은 엄청난 적들을 만들어냈고......   예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적극적이기 전에, 철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일이다. 정치적 입장이나, 윤리를 신앙에 적용시키는 일은 열정을 의심으로 전환시키기를 요구한다. 좌파가 예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좌파가 예수를 철저하게 의심하는 일 이외에 다른 방법일 수 없다. 그 철저한 의심을 통하지 않고는 좌파는 어떤 영성에도 도달할 수 없다. 없어야 옳다. 예수를 정치적으로 해석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이야말로 빌라도가 예수를 보는 시각과 얼마나 닮아 있는가. 예전에 나랑 같이 일하던 어떤 아저씨가 예수는 미국 사람 아니냐, 고 했던 적이 있는데, 하하하 차라리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이야기냐. 좌파는 예수가 왜 어떻게 미국 사람이 아닌지를 말해줘야지, 예수는 유대인이라고 대답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응?

기록

* 그저께 열두시까지 술먹음. 어제는 아, 그러고보니 어제도 딱 열두시 정도까지 술먹음. 온 몸에 맹렬한 알콜 알러지. 두드러기. 술먹으면서, 술주정뱅이들의 한심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너무 한심해서 어제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계란 까먹으며 일종의 자기 징벌적 운동을 강행. 푸쉬업 일곱세트, 윗몸일으키기 두 세트, 덤벨 4세트, 턱걸이 15개. 턱걸이 열라 힘듦. 몸무게는 무려 87.6 키로그램. 근육을 키워도 체중이 늘어나면서 턱걸이 갯수가 정말이지 무지하게 줄어들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 새벽 네 시에 잠듦. 미친듯이 가려웠지만, 안긁고 꿋꿋하게.....여덟시 반에 기상. 출근. 졸리네.

예술, 독창성에 대한 편견

* 예술이 독창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이 예술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건 반만 맞는 명제다. 역사상 어떤 예술도 오로지 독창적이기 때문에 예술인 경우는 없었다. 예술은 언제나 인정투쟁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에 더 가까웠다. 예술적 독창성이란 언제나 승인된 독창성, 공유되거나 합의된 독창성이었다. 글쓰기의 함정은 바로 여기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거나, 글이 '안나오는' 벽에 부딪쳤을 때, 독창적인 아이디어, 예술적 영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오해다. 독창성에 함몰된 예술의 자기 정의는 내 식으로 이야기하면 금태환제 시대의 이야기다. 내 농담을 더 진전시키면 최근 들어 이처럼 먼 옛날의 담론이 다시 회귀하는 이유는 저성장, 고실업 시대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인즈가 저성장, 고실업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신고전파 이전 노동가치론의 전제를 빌려오는 행위와 비슷한 패턴이다. 하하하. 예술의 독창성이 강조되고, 창궐하는 것은 부르조아 예술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사실, 예술의 독창성은 더 과학적으로 말하면 호환불가능성이다. 그런데, 이 호환불가능성은 예술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블로그 포스팅의 댓글들은 포스팅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지만, 포스팅의 의미를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댓글이 더 많이 달리면 달릴수록 해당 포스트는 더 많은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한다. 포스팅은 복사할 수 있지만, 그 반응까지 재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뭐 대충 그렇게 생각하면, 예술의 호환불가능성은 바로 그와 같은 피드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현은 '길항'이라는 개념이 문학 작품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으로 봤지만, '길항'은 현상으로써 작품, 문학이라는 사건 자체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하루키나, 대중 문학에 대한 남조선 문단의 배타적인 태도와 한편으로 순문학에 대한 상업적인 비평들은 바로 이 '길항'이 문학에 내재해 있...

올 것이 왔네

* 결국 회사에서 팀장 자리를 내놓고 말았다. 너무 놀았다. 일년 내내 지각하고, 숨어서 자고, 땡땡이 치고....근데 내가 밀려난 이유는 그것 때문은 아니고, 워낙 새로운 대표가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역시 회사 생활에서 성공하는 건 성실한 것과 별개의 문제라는 거지. 나도 웬만하면 비위 맞춰주고 싶었는데, 정말 도저히 못하겠는 걸 어쩌리.  객관적으로는 누가 봐도 내 잘못이긴 한데, 그래도 막상 닥치니 억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편하기도 하고...본질적으로는 나는 리더 같은 건 안된다는 거다. 그냥 독고다이가 젤로 맘이 편하긴 하다만....내가 회사에 들어가 8년이나 일하다니, 그것부터 기적이다. 머 암튼 널널한 회사 덕분에 널널하게 잘 다녔더랬다. 에효.....딴 데 가서 또 면접 보고 그짓을 다시 어찌 하나. 귀찮구나. 이 기회에 좀 놀았으면 좋겠지만 쩝. 아니 근데, 도대체 날 뭘 보고 팀장을 시켰는지 이해는 안가 여전히. 뭔가 내 한 시절이 또 이렇게 저문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나의 사회적 변화는 나의 시심을 무지 자극시키누나.  

비밀

* 새벽 두시, 새벽 세 시가 되면 신림동 농구 코트 옆 잠시 지상으로 올라온 지하철 선로를 통해 노란 보선 작업차가 간다. 선로반원들을 싣고 말이지. 지상으로 올라온 김에 잠시 내려서 선로 여기저기를 살피는 척 좀 쉬기도 하고. 나는 이 세상이 어떤 기계이고, 우리가 까무룩 잠든 사이에 저런 튼튼한 기술자들이 구부러진 곳을 두드려 펴고, 기름을 칠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그런 세상의 비밀 한 가지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굿 나잇.      

dancing in the moonlight

* 나는야, 이런 음악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