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렐라 오프닝-제인 폰다

새벽 두 시의 글쓰기

* 대략 열두시 전에 시작한 운동이 끝나고, 땀범벅이 된 몸으로 우유마시고, 담배 하나 피우고, 샤워 때리고 나면 이 시간이 된다. 새벽 두시. 비좁은 베란다에서 내다보면 동네가 다 지쳐서 조용하다. 지나치게 부지런한 하루였다.   * 서정주는 '가난은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다. 서정주의 저 말은 나에게 거의 금지된 문장에 가깝다. 금지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했던 자리라는 점에서 저 말은 나한테 갈등으로 되돌아 가게 만든다. 나한테 가난은 남루 이상이다. 부정적인 의미든, 긍정적인 의미든....서정주의 저 문장은 욕망 그 자체를 부인하는 도착이라고 생각한다. 도착이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술은 증상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상을 산다. 서정주의 저 말은 시적인 전문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나갔나...    예술에 있어서 지평, 혹은 비전이라는 말은 그래서 금지와 욕망이 만드는 미학적 양심과 관련된다. 미학적 양심은 금지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주체가 만들어내는 지평, 비전, 벡터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평이나 비전이, 초월적인 타자, 초월적인 가치가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건 그냥 예술가들의 자위행위다. 만일 '가난이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신이 있다면, 그것을 쏘아 넘어뜨려야 한다는 것이 내 미학적 양심의 요지다.   * 낭만주의의 전제는, 양식을 거부하고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표현이 곧 내면에 밀착해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더 말하면 양식이 존재하는 이전의 형식주의 시대에는 '내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낭만주의는 내면을 외재화하면서, 즉 내면을 주체로부터 소외시키면서 발생한 것이다. 낭만주의가 중앙집권국가의 탄생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국가가 각 개인들을 개별적으로 호명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탈주술화시켰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등장하기 시작...

오다 카즈마사

널 보고 있으면

* 강산에 노래.   * 서울역에 노숙자가 있다고 하자. 구원은 그를 삶의 결단으로 이끄는 일이지만, 연대는 노숙자에게도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그가 노숙자가 되기까지 더 많은 안전망이 작동하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그 노숙자의 인격이나 믿음과 상관없이 말이다    단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모든 이들과 연대하는 것보다 덜 가치 있거나, 더 손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머 말도 안되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연대하거나, 아니면 단 한 사람만을 구원할 수 있거나...이 두가지 선택지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두를 구원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예수는 묵시문학의 비유를 통해 각 개별자들을 실존적 결단으로 이끌려고 했다. 모두를 대속해 십자가에 매달린 일은 그의 의지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나는 단 한 사람의 구원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에 값한다고 생각한다.    시몬느 베이유는 옷을 참 못입었는데, 보봐르가 베이유를 만난 자리에서 참 옷을 못입는다고 그랬다고 한다. 보봐르의 인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베이유는 그 글이든, 인생이든 참으로 성스러운 삶을 살다가 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는 반동이었다. 파스칼이 그랬고, 우치무라 간조가 그랬다. 보봐르의 인격이 훌륭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베이유보다 진보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민중신학의 쇠퇴는 단순히 남한 교회의 부패 때문만은 아니다. 연대에 대한 신념과 구원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을까, 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이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화입마

* 책 읽기를 멈추면 주화입마.....하게 된다. 내가 책을 읽는 건, 내가 나로 끊임없이 환원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다. 그래서 주화입마가 뭐냐하면, 내가 타자와 나 사이의 차이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의 자기 확인을 반복하는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기획이다. 내가 나를 추인하고, 금지하고....내가 나를 북치고 장구치는 일이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체가 구성하는 '나'가 어떤 이유에선지 주체가 호명할 수 없는 곳에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엉뚱한 곳에 구성된 '나'는 주체가 스스로를 외상과 격리시키기 위해 구성한 '나'이다. 주체는 이 '나'가 주체가 아닌, 외상이 구성했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주체와의 연결고리가 없다는 알리바이들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러니까, 관계없음을 증명할 증거를 만든다는 것인데....   * 뱀파이어는 거울에 보이지 않는다. 거울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자아 이상'의 단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자아'를 구성하지 않는 주체다. 당연히 자아를 갖지 않는 주체는 상징 질서에 편입할 방법이 없으며, 타자와의 차이를 생산해낼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고유성이 아니라, 무한 반복되는 자기 동일성의 지옥이다. 결국 성적 주체의 공포란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성적 환타지의 뒷면. 라캉의 성관계란 없다,는 선언은 뱀파이어들을 햇빛에 내놓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봐도 훌륭한 애니 뱀파이어D에서 인간을 사랑한 뱀파이어가 햇볕에 자신을 내놓은 장면은 그래서 욜라 라캉적이다....   * 숭고는 실재의 도래를 가장한 것이다. 좀비를 보라.

숭고 III

* 리얼리티를 거머쥐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바르트가 푼크툼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우발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것이다. 하이퍼 리얼리티는 리얼리티라고 상정된 것을 세밀화하는 방법으로, 리얼리티로부터 달아난다. 실재가 도래하는 통로를 이미지로, 스크린으로 겹겹이 필터링 하는 것이고, 이미지를 완전히 통제해 우발성의 자리를 최소화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직관이란 것은 통념과 같이 인과나 논리를 무시한, 신비로운 감각이나, 초월적 이성이 아니다. 직관은 이와 같은 수많은 필터, 이미지를 걷어낸 직접성이며, 우발성을 통해 도래하는 실재를 수긍하고, 추인하는 일이다. A는 Z다. A가 B이고, B가 C이고, C가 D이고..마침내 Z가 된다는 인과의 연쇄는 저 하이퍼 리얼리티의 방법처럼, A를 향해 도래하는 Z를 방해하고, 지연시키려는 행위다. A에 Z가 도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과가 시작된다는 것이 리얼리티가 아닐까. 우발성은 결국 Z의 도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이 Z의 도래를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때, 숭고는 A를 완전히 폐기한다....어떤 식으로 폐기하게 될까.....

호모루덴스는 멸종하지 않아! 않는다규!!

* 언니라는 말은 참 좋다. 아큐라 언니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월호에 올린 글이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쫌 놀려 먹었는데 ㅋ 암튼 글쟁이 데뷔작인 셈인가. ㅎㅎ     호모루덴스는 멸종하지 않아 -놀이네트(놀이운동가)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하위징아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 놀이 ’ 고 , 놀이라는 바탕 위에 인간의 문명이 세워졌다 . 1938 년 출판된 < 호모루덴스 > 에 이러한 통찰이 담겨 있다 . 그러나 통념상 놀이는 문화의 하위 영역이다 . 개인의 삶에서 노동 또는 학업과 휴식 사이에 겨우 존재하며 , 재미는 있지만 별다른 목적과 가치가 없는 활동이 바로 놀이다 . 통념은 힘이 세며 일정한 진실을 반영한다 . 우리는 재미없이 살고 있으며 우리 삶은 , 놀이가 그러하듯 , 어떤 목적을 위하지 아니한다 . 놀이는 매우 자명하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활동이지만 , 아직은 인간의 언어로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복잡한 과정과 원리를 가진 실체다 . 놀이는 에브리싱 (Everything) 인 동시에 낫싱 (Nothing) 인 그 무엇이며 , 일상 속 복잡계이다 . 놀이라면 당연히 전래놀이라는 선명한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하면 선명하지 않은 현실과 부합하기 어렵다 . 극단의 여러 관점을 동시에 긍정해야 한다 .         과연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놀지 않는가 ? 답은 만만치 않다 . 놀이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 우선 놀이는 자유일 수 있다 . 놀이의 반대는 ‘ 억압 ’ 이 된다 . 우리 아이들은 오직 공부할 자유만 있어 내전 중인 나라나 극히 빈곤한 나라의 아이들만큼 심각한 ‘ 놀이실조 ’ 상태다 . 놀이를 성인기의 준비로 보는 관점도 있다 . ‘ 어려서 놀며 기른 힘 ’ 으로 ‘ 세상의 벽과 사회에서 받을 상처 ’ 를 넘거나 치유하게 된다 . 그렇다면 산과 들 , 골목에서 뛰노는 것도 놀이요 , 공부...

간만에 제시카

4천원 인생

* 논픽션은 그 현장성 때문에, 더 자유롭다. 논픽션은 좀 더 감상적이 되어도 리얼하고, 좀 더 선동적이 되어도 리얼하다. 논픽션은 감상성이 리얼리즘을 좀먹지 않는 장르다. 현장은 우리가 리얼리스틱하다고 말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리얼하기 때문이다. 논픽션은 탐욕적으로 세밀할 필요가 없다. 논픽션은 스냅샷처럼 우발성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21에서 진행되었던 노동 OTL 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4천원 인생이라는 책인데, 마트에서, 식당 아줌마들과, 이주 노동자의 옆에서 함께 먹고 자며 태어난 현장 보고들이다. 물론, 체험 삶의 현장처럼 머 땀의 소중함을....어쩌구 이런 내용은 아니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의 현장이다. 고은의 만인보 따위는 이 논픽션에 비하면, 리얼리스틱-엔터테인먼트...    

숭고 II

* 어머니는 남근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다, 어미니에게 남근은 없다, 아버지가 남근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다, 아버지는 남근을 결여하고 있다. 남근은 미끄러져 나가면서, 기표의 연쇄를 만든다. 때문에 남근은 언제나 결여된 존재다. 그것은 상징을 만들어내는 텅 빈 무엇이다. 그것은 결코 신체/주체로 귀속되지 않는 문장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한다고 적는다...    문장은 그 문장이 최종적으로 귀속되는 주체를 감출 때에만 완결된다. 영원히 미끄러지는 주체, 탈주하는 주체를 불러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문장의 중간을 잘라내고, 못박고, 주체의 흔적을 잠시 거머쥔다. 나는 남근이다, 나는 남근이 아니다, 나는 남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나는 남근을 가지고 싶다, 너는 가질 수 없다, 내가 네 아버지다. 이 금지를 통하지 않고는 너는 남근을 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상징에 몸담을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잠시마나, 네 주체의 미끄러짐을 멈추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상징 질서들이다.   * 다시 말해보자. 생략된 것들이 있다. 나는 어머니의 남근이다. 아니다. 나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고 싶다... 내가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내가 남근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불가능성을 통해 도달한 곳이다. 나는 남근이 되고 싶다. 불가능하다. 나는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    그런데, 숭고는 내가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 가 아니라, 내가 남근이 되고 싶다, 의 욕망이 불러낸 어떤 것이다. 숭고의 영역에서 아버지는 남근을 소유하거나, 결여한 자가 아니라, 남근 그 자체이다. 아니, 나는 아버지가 남근 그 자체이기를 원한다. 때문에 아버지 기표가 대표하는 타자성이 유실된다. 숭고는 타자의 자기 동일성을 유실시킨다. 타자의 타자됨, 즉 타자성은 나,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타자에게로 떠넘겨진다. 주체가 탈주하는 것이 아니...

숭고

* 숭고는 실재의 도래를 흉내내는 행위다. 외상적 실재의 도래를 상징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행위. 그러나 숭고는 실재가 상징 질서 안으로 편입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숭고에 있어서 '흉내'는 재현적 모방이 아니라, '흉내'가 실재 그 자체와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차이를 확인하려는 행위다. 그러니까 숭고는 '타자성'이 완전히 제거된 타자다. 아니, 숭고는 타자의 '타자성'을 끝도 없이 타자의 타자에게 위임한다. 기존의 상징 질서를 추인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타자가 곧 숭고다.    우리가 사랑의 어떤 순간, 어떻게 보면 가장 부정적인 사랑의 순간, 사랑이 오로지 나라는 주체에 귀속되는 순간, 사랑이 나라는 환원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절망의 순간에 그래서, 숭고가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숭고의 영원한 위임장을 만들어봤자, 결국 실재는 그가 도래할 신체로 귀속된다...........그 위임장이 권위를 상실하는 순간, 혹은 그 위임장이 마침내 신체에 도달하고 마는 순간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전쟁터의 종군 신부, 종군 목사들이야말로 숭고한 존재다. 그들이 없다면 신체는 좀비가 될 거다. 숭고와 실재 사이를 헤매는..

이빨도 안들어가는 시

* 오선생님이라고, 나한테 선생이 하나 있었는데, 뭐 술 좋아하고, 도박 좋아하고, 돈도 좀 좋아하고, 시도 좋아하고...시 선생이었다. 아무튼 어느날 오선생 왈, 내가 쓰는 시는 너무 딱딱하다는 거다. 이빨도 안들어가는 시. 이빨도 안들어가는 시라니..거 참, 맞는 말씀이다.....시를 좋아하고, 시만 읽어가지고는 시인이 될 수 없나니...   * 지하철에서 시집을 꺼내 읽으면 참 부끄럽다. 회사에서도 그렇고....미국식으로 부끄럽다..... 캄캄한 밤에 조용히 시집을 꺼냈다가, 에라이...하고 욕나오는 시집들은, 좀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된다. 그 밤에 혼자 조용히 깨어나서, 시집에 대고 욕하는 사람의 심정을 시인들은 좀 알아야 된다.   * 시쓰는 일은 별 게 없다. 내가 아주아주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일부터다. 좀 더 나아가면 내가 아주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순간, 시는 굳이 말걸지 않아도 커뮤니케이션 이상의 무엇이 된다.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는가...그런데 어쩔 수가 없다. 시가 그렇다. 약한 사람이 시를 쓰고, 한없이 약한 사람들의 곁에 남는 게 시다. 사회적 약자..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무지무지 강해져야 하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 외엔 더 방법이 없는 사회에서 시를 쓴다는 건, 그 많은 사람들 대신 나약하다고 말하고, 그 나약함을 보존하는 일이다. 나약한 것도 살아남 게 하는 게, 그런 게 시의 이념이라고 알고 있다.   * 요즘 젊은 친구들은 요만큼도 약점을 보이려고 하지를 않는다. 때로 작은 흠은 그 사람의 매력이 되기도 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되기도 하는데,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밀어붙이면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자신의 나약함을 내보이는 일이 없다. 설사 조금 그런 모습을 들키게  되면 너무 심각하게 반응한다. 뭐 조직에서는 좋아하는 인간형이기는 하다만, 나처럼 농담에서 농담으로 끝나는 인간과는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당혹스러워 한다.   ...

가치의 연대

* 뭐 이제 다 지난 말이 되어버렸지만, 진보신당이 반 mb 연합에 대해서, 가치의 연대라는 말을 들고 나온 것에 대해서, 나는 참 마음에 안든다. 정책 연대라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쓰이긴 했지만, 가치의 연대라는 말은 좀 생각해봐야 할 수사다.    가치의 연대라는 말은 가치에 대한 공유 없이 이루어지는 전략적 이합집산은 그져 선거용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나는 가치의 연대라는 이 말이 진보신당의 어떤 무기력을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가치의 연대라는 말이, 진보신당 내에 도사리고 있는, 지나친 정치적 관대함이나, 몰계급성, 노동 중심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자기 정체성을 폭로하고 있는 말은 아닌지,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혹시 생태주의자와 페미니스트들과 자유주의적 관점들을 마냥 한없이 포괄하고 있는 진보신당의 무지개 스탠스가 '가치 연대'라는 말을 탄생시킨 원인은 아닐까. 혹시 가치 연대라는 말이 닳고 닳은 정치 공학과 엄밀한 정치적 입장 사이의 어중간한 어디쯤을 가리키는 진보신당의 자기 변명은 아닐까.    나는 어떤 계급, 어떤 목소리 없는 자들을 대신해 정치적 지분을 쟁취하기 위해 태어난 대중정당에게 '가치의 연대'라는 말은 너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가치의 연대라니, 이건 부르조아들의 슬로건에 가깝지 않나. 부르조아의 정치 논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부르조아의 정치 논리에는, 그 주체가 완전히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민을 살리겠다,는 부르조아 정당들의 슬로건에는 '누가' 서민을 살리겠다는 말인지가 철저하게 감춰져 있다. 서민들이 직접 서민을 살리도록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부르조아들이 서민들을 살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부르조아는 정치적 입장을 갖지 않아도, 다만 정치 공학을 열심히 수행하면, 부르조아지의 이익에 완전히 부합하는 정치적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조...

바비킴 망했네..

* 바비킴 새로 올라온 노래 들었는데, 망했다. 뭐하자는 건가.   * 제프브리지스가 크레이지 하트에서 늙은 컨츄리 가수 역할을 했다. 제프브리지스도 좋아하고, 카우보이 모자도 좋아하고, 이런 블루스 풍의 컨츄리도 좋아해서, 아주 재미있게 봤다. 제프 브리지스가 부릅니다. brand new angel  

어떤 트위터

* 이문재 시인의 시였는지, 이문재의 산문이었는지, 이문재에 대한 산문이었는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메모지들에 대한 글이 생각난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인들의 사정은, 왕왕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과 쪽글들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풍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가난한 쪽글들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면, 반대로 팡세 풍의 잠언들은 '글쓰기의 쾌락'에 대한 금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침묵을 향하는 언어'로 흔히 표현되는 잠언들이 감추려고 하면서, 또 어쩔 수 없이 보여주는 것은 글쓰기라는 행위가 불러내는 주이상스다.    근데, 트위터가 보여주는 것은 언제나, 어떤 말이든 침묵보다 낫다는 메시지다. 침묵은 금, 이라는 말은 금태환제가 존재하던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맘에 든다.

상도동 자전거

* 자전거를 타고, 맹산..인가 하는데를 올라갔다 내려와서, 고기를 먹고, 예술의 전당에서 상도동 집까지 자전거를 탔다. 헥헥헥헥. 폐달을 밟는 발이, 허벅지가 '고통을 더 다오. 조금 더! 조금만 더!!' 를 외친다. 그건 그렇고, 이 고통과 별개로 아주 길 가 양 옆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난 것인데, '방어'라는 말을 쓰는 이상 정신분석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어' '방어기제' 라는 말이 '심리학'과 '정신분석'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 삼성이라는 메인 스폰서의 존재는 이번에 나온 피디수첩 검사 어쩌구 이야기를 한 순간에 코메디로 만들어버린다. 삼성이라는 존재는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윤리적 원근법을 뒤틀어버린다.  

히스테리증자의 사랑, 사랑받음 / 진실

*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대상에게 가 의미있는 '체험'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만일 그 대상이, 그 타자가 히스테리증자라면? 히스테리증자의 입장에서 사랑받는 일이란 '알 수 없지만 체험되는 어떤 것' 이다. 그러나 히스테리증자에게 '체험'이란 기본적으로 외상적인 것이고, '앎'을 지연시키는 어떤 것이다. 히스테리증자에게 '체험'은 전체를 조망하는 '앎'의 외연을 자꾸만 확대시키기를 요구하는 어떤 것이며, 차라리 '예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무엇이다.    언어가 선재적이라면, 사랑은 선험적이다. 사랑은 '앎'을 통하지 않고도, 체험으로 곧바로 수렴된다. 히스테리증자에게 이 같은 사랑의 직접성은 '앎'의 무기력을 폭로하는 위협으로 작동한다. 사랑의 선험성은 언어의 선재성을 위협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에게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확인시키는 존재다.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타자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 사랑은 히스테리증자가 스스로를 '앎'의 일부로 귀속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때문에 히스테리증자는 사랑을 받아들일 때, 이유를 원한다. 이유가 사랑을 근거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가 사랑을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선험성은 언제나, 히스테리증자의 이와 같은 기획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킨다. 히스테리증자가 사랑에 노출된다는 것은, 불안과 위협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 똥은 언어화도 되지 않고, 외상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똥을 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 고유명사, 시, 위치 없음, 좌표

* 구태의연하게도 사랑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고유명사는 타자가 가진 차이로써의 고유성을 완전히 승인하는 일이며, 기능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타자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름은 때문에, 어이없게도 차이로써의 나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내가 호명하는, 사랑하는 상대방의 이름은 그 우주를 그 우주로써 승인하는 일이다. 내 존재는 그 동일성을 확인해줌으로써 현존을 획득한다. 타자가 오직 그 자신이라는 동일성을 확정하는 일은 타자가 존재하는 그 가능성의 우주를 순간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며, '차이'조차 허락될 수 없는 나를...불가능으로 상정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사랑의 존재 방식은, 시의 존재 이유와 비슷하다. 시의 언어는 결국 궁극적으로 모조리 고유명사일 수밖에 없다. 시가 죽은 말을 되살리는 방식은, 그가 존재하는 우주를 되살려, 그 말을 완전히 호환불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시는 말이 가지는 상징성, 질서, 그 전체로써의 우주를 불러낸다. 시는 그 호환불가능성, 즉 기능성을 완전히 넘어서는 포괄적 가능성을 되살리려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을 가진다. 시에 있어서 은유는 바로, 그 기능성을 깨부수려는 과정이다.    고유명사와 기능적 언어 사이에 좌표가 존재한다. 좌표는 고유명사도 아니며, 또한 기능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좌표는 위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질량 없는, 현존하지 않는 어떤 것을 불러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무와 존재 사이의 '0'이다. 그것은 불안의 기표다. 사랑의 대상인 타자, 그 타자를 불러내는 고유명사가 내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내가 좌표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완전한 차이를 통해 타자를 불러내고, 타자의 오직, 그 자신만의 우주를, 고유명사를 통해 불러냄과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를 부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좌표로 존재하는 나는 내가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자기 동일...

라인하르트 폰 INTP / 근육

▩ INTP 아이디어뱅크형 ▩ 조용하고 과묵하며 논리와 분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좋아한다 . 과묵하나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말을 잘하며 이해가 빠르고 높은 직관력으로 통찰하는 재능과 지적 호기심이 많다. 개인적인 인간관계나 친목회 혹은 잡담 등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매우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며 객관적비평을 잘 한다. 지적 호기심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 즉 순수과학, 연구, 수학, 엔지니어링 분야나 추상적 개념을 다루는 경제, 철학, 심리학 분야의 학문을 좋아한다.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사교성이 결여되기 쉬운 경향이 있고, 때로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은근히 과시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거만하게 보일 수 있다. ▒ 일반적인 특성 ▒ 행동하기 보다 책을 통해서 배운다. (책중독) 높은 직관력으로 통찰하는 재능과 지적관심이 많다 조용하고 말이 없으나 자기의 관심 분야에서는 말을 많이 한다 정서표현이 별로 없어 친해지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기분이나 감정도 생각을 통해서 한다 지나치게 지적이고 추상적이며 설명이 너무 이론적이다 황당무게한 공상을 잘 한다 비현실적이며 비약이 심하다 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생각은 창의적인데 실천이 부족하다 조직이나 단계, 계통 등에 약하다 충동적이다 매뉴얼 보기 싫어한다 정장을 싫어한다 패션감각이 둔하다 드라마, 한국영화 잘 안 본다 뻔한 이야기나 서론이 긴 것 참기 어렵다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은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잊어버린다. (건망증) 머릿속에 있다가 막판에 후다닥 일 처리를 한다 한끼 떼우면 된다 남들 좋아하는 연예인, 악세사리 등에 관심 없다 추리소설 좋아한다 잡담 모임 후에는 허무감을 느낀다 친한 친구라도 일 없으면 연락 안다 공상과 상상속에 있을 때가 많다   * 그렇다 치고 요즘 나는 스파르타쿠스를 열심히 보는데, 근육들이 장난 아니다. 그런데, 정말 검투사들의 근육이 저랬을까...

김현수 / 잭키 브라운 / 글쓰기

* 나는 김현수가 이대로, 아무 연예인도 안만나고,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야구에만 미친듯이 빠져 있다가, 결국 동정으로 마흔 살 넘어서까지 야구밖에 모르는 야구병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끔 무협지 같은 데 보면 나이를 무지 많이 먹고도, 동정이라서 막 무예가 엄청나게 뛰어난 고수들이 나오는데, 나는 현수가 그런 환타지를 실현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엘쥐의 모든 것이 싫다. 잘 해도 싫고, 못해도 싫고, 페어플레이 해도 싫고, 다 싫다. 거기 감독도 싫고, 선수도 싫고, 유니폼도, 팬들도 모조리 싫다....음...그리고 두산 유니폼은 뭐 볼수록 뭐 적응도 되네....   * 타란티노 영화 중에 잭키 브라운이라는 영화가 있다. 늙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한 늙은 스튜어디스가 나오고, 늙은 보석 보증인이 나온다. 머 큰 환타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크게 변할 것도 없는 심심한 삶이다. 뭐 씨발 죽을 때까지 자기계발하고 외국어 배우고, 지랄들 하고...도전하고, 난리나는 삶....그렇게들 살아봐라. 좋은가.    아무리 길게 잡아봤자, 딱 80살 정도까지 산다. 내가 신이라면, 니들한테 이렇게 말하겠다. '난 뭐 니들이 한 1,000년은 살 줄 알았어~' 혹은 '깝치지 좀 마라'....   * 글쓰기는 '자기 전이' 다. 창작자는 창작자의 삶에 전이된다. 혹은 창작자의 삶은 창작자에 전이된다. 혹은 창작자는 문장의 주인에게 전이된다. 글을 쓰면서 나는 분리되고, 또 분리된 것에 동화된다. 때문에 전이가 일어나는 그 장소는 곳바로, 우발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주체가 주체에게 주도권을 내어준다. 균열과 틈을 허가한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고통이 되돌아오고, 그것이 남김없이 해명된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다른 주체를 탄생시킨다. 불가능한 주체가 가능한 주체를 불러낸다. 뭔 소리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