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제시카

4천원 인생

* 논픽션은 그 현장성 때문에, 더 자유롭다. 논픽션은 좀 더 감상적이 되어도 리얼하고, 좀 더 선동적이 되어도 리얼하다. 논픽션은 감상성이 리얼리즘을 좀먹지 않는 장르다. 현장은 우리가 리얼리스틱하다고 말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리얼하기 때문이다. 논픽션은 탐욕적으로 세밀할 필요가 없다. 논픽션은 스냅샷처럼 우발성을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21에서 진행되었던 노동 OTL 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4천원 인생이라는 책인데, 마트에서, 식당 아줌마들과, 이주 노동자의 옆에서 함께 먹고 자며 태어난 현장 보고들이다. 물론, 체험 삶의 현장처럼 머 땀의 소중함을....어쩌구 이런 내용은 아니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의 현장이다. 고은의 만인보 따위는 이 논픽션에 비하면, 리얼리스틱-엔터테인먼트...    

숭고 II

* 어머니는 남근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다, 어미니에게 남근은 없다, 아버지가 남근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다, 아버지는 남근을 결여하고 있다. 남근은 미끄러져 나가면서, 기표의 연쇄를 만든다. 때문에 남근은 언제나 결여된 존재다. 그것은 상징을 만들어내는 텅 빈 무엇이다. 그것은 결코 신체/주체로 귀속되지 않는 문장과 같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한다고 적는다...    문장은 그 문장이 최종적으로 귀속되는 주체를 감출 때에만 완결된다. 영원히 미끄러지는 주체, 탈주하는 주체를 불러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문장의 중간을 잘라내고, 못박고, 주체의 흔적을 잠시 거머쥔다. 나는 남근이다, 나는 남근이 아니다, 나는 남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나는 남근을 가지고 싶다, 너는 가질 수 없다, 내가 네 아버지다. 이 금지를 통하지 않고는 너는 남근을 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상징에 몸담을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잠시마나, 네 주체의 미끄러짐을 멈추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상징 질서들이다.   * 다시 말해보자. 생략된 것들이 있다. 나는 어머니의 남근이다. 아니다. 나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고 싶다... 내가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내가 남근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불가능성을 통해 도달한 곳이다. 나는 남근이 되고 싶다. 불가능하다. 나는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    그런데, 숭고는 내가 남근을 소유하고 싶다, 가 아니라, 내가 남근이 되고 싶다, 의 욕망이 불러낸 어떤 것이다. 숭고의 영역에서 아버지는 남근을 소유하거나, 결여한 자가 아니라, 남근 그 자체이다. 아니, 나는 아버지가 남근 그 자체이기를 원한다. 때문에 아버지 기표가 대표하는 타자성이 유실된다. 숭고는 타자의 자기 동일성을 유실시킨다. 타자의 타자됨, 즉 타자성은 나,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타자에게로 떠넘겨진다. 주체가 탈주하는 것이 아니...

숭고

* 숭고는 실재의 도래를 흉내내는 행위다. 외상적 실재의 도래를 상징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행위. 그러나 숭고는 실재가 상징 질서 안으로 편입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숭고에 있어서 '흉내'는 재현적 모방이 아니라, '흉내'가 실재 그 자체와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차이를 확인하려는 행위다. 그러니까 숭고는 '타자성'이 완전히 제거된 타자다. 아니, 숭고는 타자의 '타자성'을 끝도 없이 타자의 타자에게 위임한다. 기존의 상징 질서를 추인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타자가 곧 숭고다.    우리가 사랑의 어떤 순간, 어떻게 보면 가장 부정적인 사랑의 순간, 사랑이 오로지 나라는 주체에 귀속되는 순간, 사랑이 나라는 환원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절망의 순간에 그래서, 숭고가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숭고의 영원한 위임장을 만들어봤자, 결국 실재는 그가 도래할 신체로 귀속된다...........그 위임장이 권위를 상실하는 순간, 혹은 그 위임장이 마침내 신체에 도달하고 마는 순간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전쟁터의 종군 신부, 종군 목사들이야말로 숭고한 존재다. 그들이 없다면 신체는 좀비가 될 거다. 숭고와 실재 사이를 헤매는..

이빨도 안들어가는 시

* 오선생님이라고, 나한테 선생이 하나 있었는데, 뭐 술 좋아하고, 도박 좋아하고, 돈도 좀 좋아하고, 시도 좋아하고...시 선생이었다. 아무튼 어느날 오선생 왈, 내가 쓰는 시는 너무 딱딱하다는 거다. 이빨도 안들어가는 시. 이빨도 안들어가는 시라니..거 참, 맞는 말씀이다.....시를 좋아하고, 시만 읽어가지고는 시인이 될 수 없나니...   * 지하철에서 시집을 꺼내 읽으면 참 부끄럽다. 회사에서도 그렇고....미국식으로 부끄럽다..... 캄캄한 밤에 조용히 시집을 꺼냈다가, 에라이...하고 욕나오는 시집들은, 좀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된다. 그 밤에 혼자 조용히 깨어나서, 시집에 대고 욕하는 사람의 심정을 시인들은 좀 알아야 된다.   * 시쓰는 일은 별 게 없다. 내가 아주아주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일부터다. 좀 더 나아가면 내가 아주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순간, 시는 굳이 말걸지 않아도 커뮤니케이션 이상의 무엇이 된다. 손발이 오그라들지 않는가...그런데 어쩔 수가 없다. 시가 그렇다. 약한 사람이 시를 쓰고, 한없이 약한 사람들의 곁에 남는 게 시다. 사회적 약자..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무지무지 강해져야 하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 외엔 더 방법이 없는 사회에서 시를 쓴다는 건, 그 많은 사람들 대신 나약하다고 말하고, 그 나약함을 보존하는 일이다. 나약한 것도 살아남 게 하는 게, 그런 게 시의 이념이라고 알고 있다.   * 요즘 젊은 친구들은 요만큼도 약점을 보이려고 하지를 않는다. 때로 작은 흠은 그 사람의 매력이 되기도 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되기도 하는데,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밀어붙이면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자신의 나약함을 내보이는 일이 없다. 설사 조금 그런 모습을 들키게  되면 너무 심각하게 반응한다. 뭐 조직에서는 좋아하는 인간형이기는 하다만, 나처럼 농담에서 농담으로 끝나는 인간과는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당혹스러워 한다.   ...

가치의 연대

* 뭐 이제 다 지난 말이 되어버렸지만, 진보신당이 반 mb 연합에 대해서, 가치의 연대라는 말을 들고 나온 것에 대해서, 나는 참 마음에 안든다. 정책 연대라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쓰이긴 했지만, 가치의 연대라는 말은 좀 생각해봐야 할 수사다.    가치의 연대라는 말은 가치에 대한 공유 없이 이루어지는 전략적 이합집산은 그져 선거용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나는 가치의 연대라는 이 말이 진보신당의 어떤 무기력을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가치의 연대라는 말이, 진보신당 내에 도사리고 있는, 지나친 정치적 관대함이나, 몰계급성, 노동 중심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자기 정체성을 폭로하고 있는 말은 아닌지,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혹시 생태주의자와 페미니스트들과 자유주의적 관점들을 마냥 한없이 포괄하고 있는 진보신당의 무지개 스탠스가 '가치 연대'라는 말을 탄생시킨 원인은 아닐까. 혹시 가치 연대라는 말이 닳고 닳은 정치 공학과 엄밀한 정치적 입장 사이의 어중간한 어디쯤을 가리키는 진보신당의 자기 변명은 아닐까.    나는 어떤 계급, 어떤 목소리 없는 자들을 대신해 정치적 지분을 쟁취하기 위해 태어난 대중정당에게 '가치의 연대'라는 말은 너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가치의 연대라니, 이건 부르조아들의 슬로건에 가깝지 않나. 부르조아의 정치 논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부르조아의 정치 논리에는, 그 주체가 완전히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민을 살리겠다,는 부르조아 정당들의 슬로건에는 '누가' 서민을 살리겠다는 말인지가 철저하게 감춰져 있다. 서민들이 직접 서민을 살리도록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부르조아들이 서민들을 살리겠다는 것도 아니다. 부르조아는 정치적 입장을 갖지 않아도, 다만 정치 공학을 열심히 수행하면, 부르조아지의 이익에 완전히 부합하는 정치적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조...

바비킴 망했네..

* 바비킴 새로 올라온 노래 들었는데, 망했다. 뭐하자는 건가.   * 제프브리지스가 크레이지 하트에서 늙은 컨츄리 가수 역할을 했다. 제프브리지스도 좋아하고, 카우보이 모자도 좋아하고, 이런 블루스 풍의 컨츄리도 좋아해서, 아주 재미있게 봤다. 제프 브리지스가 부릅니다. brand new angel  

어떤 트위터

* 이문재 시인의 시였는지, 이문재의 산문이었는지, 이문재에 대한 산문이었는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메모지들에 대한 글이 생각난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인들의 사정은, 왕왕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과 쪽글들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풍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가난한 쪽글들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면, 반대로 팡세 풍의 잠언들은 '글쓰기의 쾌락'에 대한 금욕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침묵을 향하는 언어'로 흔히 표현되는 잠언들이 감추려고 하면서, 또 어쩔 수 없이 보여주는 것은 글쓰기라는 행위가 불러내는 주이상스다.    근데, 트위터가 보여주는 것은 언제나, 어떤 말이든 침묵보다 낫다는 메시지다. 침묵은 금, 이라는 말은 금태환제가 존재하던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맘에 든다.

상도동 자전거

* 자전거를 타고, 맹산..인가 하는데를 올라갔다 내려와서, 고기를 먹고, 예술의 전당에서 상도동 집까지 자전거를 탔다. 헥헥헥헥. 폐달을 밟는 발이, 허벅지가 '고통을 더 다오. 조금 더! 조금만 더!!' 를 외친다. 그건 그렇고, 이 고통과 별개로 아주 길 가 양 옆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난 것인데, '방어'라는 말을 쓰는 이상 정신분석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어' '방어기제' 라는 말이 '심리학'과 '정신분석'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 삼성이라는 메인 스폰서의 존재는 이번에 나온 피디수첩 검사 어쩌구 이야기를 한 순간에 코메디로 만들어버린다. 삼성이라는 존재는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윤리적 원근법을 뒤틀어버린다.  

히스테리증자의 사랑, 사랑받음 / 진실

*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대상에게 가 의미있는 '체험'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만일 그 대상이, 그 타자가 히스테리증자라면? 히스테리증자의 입장에서 사랑받는 일이란 '알 수 없지만 체험되는 어떤 것' 이다. 그러나 히스테리증자에게 '체험'이란 기본적으로 외상적인 것이고, '앎'을 지연시키는 어떤 것이다. 히스테리증자에게 '체험'은 전체를 조망하는 '앎'의 외연을 자꾸만 확대시키기를 요구하는 어떤 것이며, 차라리 '예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무엇이다.    언어가 선재적이라면, 사랑은 선험적이다. 사랑은 '앎'을 통하지 않고도, 체험으로 곧바로 수렴된다. 히스테리증자에게 이 같은 사랑의 직접성은 '앎'의 무기력을 폭로하는 위협으로 작동한다. 사랑의 선험성은 언어의 선재성을 위협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에게 끊임없이 '자기 동일성'을 확인시키는 존재다.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타자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 사랑은 히스테리증자가 스스로를 '앎'의 일부로 귀속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때문에 히스테리증자는 사랑을 받아들일 때, 이유를 원한다. 이유가 사랑을 근거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가 사랑을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선험성은 언제나, 히스테리증자의 이와 같은 기획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킨다. 히스테리증자가 사랑에 노출된다는 것은, 불안과 위협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 똥은 언어화도 되지 않고, 외상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똥을 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 고유명사, 시, 위치 없음, 좌표

* 구태의연하게도 사랑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고유명사는 타자가 가진 차이로써의 고유성을 완전히 승인하는 일이며, 기능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타자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름은 때문에, 어이없게도 차이로써의 나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내가 호명하는, 사랑하는 상대방의 이름은 그 우주를 그 우주로써 승인하는 일이다. 내 존재는 그 동일성을 확인해줌으로써 현존을 획득한다. 타자가 오직 그 자신이라는 동일성을 확정하는 일은 타자가 존재하는 그 가능성의 우주를 순간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며, '차이'조차 허락될 수 없는 나를...불가능으로 상정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사랑의 존재 방식은, 시의 존재 이유와 비슷하다. 시의 언어는 결국 궁극적으로 모조리 고유명사일 수밖에 없다. 시가 죽은 말을 되살리는 방식은, 그가 존재하는 우주를 되살려, 그 말을 완전히 호환불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시는 말이 가지는 상징성, 질서, 그 전체로써의 우주를 불러낸다. 시는 그 호환불가능성, 즉 기능성을 완전히 넘어서는 포괄적 가능성을 되살리려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을 가진다. 시에 있어서 은유는 바로, 그 기능성을 깨부수려는 과정이다.    고유명사와 기능적 언어 사이에 좌표가 존재한다. 좌표는 고유명사도 아니며, 또한 기능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좌표는 위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질량 없는, 현존하지 않는 어떤 것을 불러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무와 존재 사이의 '0'이다. 그것은 불안의 기표다. 사랑의 대상인 타자, 그 타자를 불러내는 고유명사가 내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내가 좌표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완전한 차이를 통해 타자를 불러내고, 타자의 오직, 그 자신만의 우주를, 고유명사를 통해 불러냄과 동시에, 스스로의 존재를 부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좌표로 존재하는 나는 내가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자기 동일...

라인하르트 폰 INTP / 근육

▩ INTP 아이디어뱅크형 ▩ 조용하고 과묵하며 논리와 분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좋아한다 . 과묵하나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말을 잘하며 이해가 빠르고 높은 직관력으로 통찰하는 재능과 지적 호기심이 많다. 개인적인 인간관계나 친목회 혹은 잡담 등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매우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며 객관적비평을 잘 한다. 지적 호기심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 즉 순수과학, 연구, 수학, 엔지니어링 분야나 추상적 개념을 다루는 경제, 철학, 심리학 분야의 학문을 좋아한다.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사교성이 결여되기 쉬운 경향이 있고, 때로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은근히 과시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거만하게 보일 수 있다. ▒ 일반적인 특성 ▒ 행동하기 보다 책을 통해서 배운다. (책중독) 높은 직관력으로 통찰하는 재능과 지적관심이 많다 조용하고 말이 없으나 자기의 관심 분야에서는 말을 많이 한다 정서표현이 별로 없어 친해지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기분이나 감정도 생각을 통해서 한다 지나치게 지적이고 추상적이며 설명이 너무 이론적이다 황당무게한 공상을 잘 한다 비현실적이며 비약이 심하다 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생각은 창의적인데 실천이 부족하다 조직이나 단계, 계통 등에 약하다 충동적이다 매뉴얼 보기 싫어한다 정장을 싫어한다 패션감각이 둔하다 드라마, 한국영화 잘 안 본다 뻔한 이야기나 서론이 긴 것 참기 어렵다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은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잊어버린다. (건망증) 머릿속에 있다가 막판에 후다닥 일 처리를 한다 한끼 떼우면 된다 남들 좋아하는 연예인, 악세사리 등에 관심 없다 추리소설 좋아한다 잡담 모임 후에는 허무감을 느낀다 친한 친구라도 일 없으면 연락 안다 공상과 상상속에 있을 때가 많다   * 그렇다 치고 요즘 나는 스파르타쿠스를 열심히 보는데, 근육들이 장난 아니다. 그런데, 정말 검투사들의 근육이 저랬을까...

김현수 / 잭키 브라운 / 글쓰기

* 나는 김현수가 이대로, 아무 연예인도 안만나고,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야구에만 미친듯이 빠져 있다가, 결국 동정으로 마흔 살 넘어서까지 야구밖에 모르는 야구병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끔 무협지 같은 데 보면 나이를 무지 많이 먹고도, 동정이라서 막 무예가 엄청나게 뛰어난 고수들이 나오는데, 나는 현수가 그런 환타지를 실현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엘쥐의 모든 것이 싫다. 잘 해도 싫고, 못해도 싫고, 페어플레이 해도 싫고, 다 싫다. 거기 감독도 싫고, 선수도 싫고, 유니폼도, 팬들도 모조리 싫다....음...그리고 두산 유니폼은 뭐 볼수록 뭐 적응도 되네....   * 타란티노 영화 중에 잭키 브라운이라는 영화가 있다. 늙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한 늙은 스튜어디스가 나오고, 늙은 보석 보증인이 나온다. 머 큰 환타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크게 변할 것도 없는 심심한 삶이다. 뭐 씨발 죽을 때까지 자기계발하고 외국어 배우고, 지랄들 하고...도전하고, 난리나는 삶....그렇게들 살아봐라. 좋은가.    아무리 길게 잡아봤자, 딱 80살 정도까지 산다. 내가 신이라면, 니들한테 이렇게 말하겠다. '난 뭐 니들이 한 1,000년은 살 줄 알았어~' 혹은 '깝치지 좀 마라'....   * 글쓰기는 '자기 전이' 다. 창작자는 창작자의 삶에 전이된다. 혹은 창작자의 삶은 창작자에 전이된다. 혹은 창작자는 문장의 주인에게 전이된다. 글을 쓰면서 나는 분리되고, 또 분리된 것에 동화된다. 때문에 전이가 일어나는 그 장소는 곳바로, 우발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주체가 주체에게 주도권을 내어준다. 균열과 틈을 허가한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고통이 되돌아오고, 그것이 남김없이 해명된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다른 주체를 탄생시킨다. 불가능한 주체가 가능한 주체를 불러낸다. 뭔 소리냐.. - -;;;

나, 클리닉은 말한다

* 자본주의는 욕망의 본질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이라고 호도한다. 단순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 그런데, 그럴까? 자기 계발서들은 원하는 것을 얻으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정해진 일들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욕망을 선취해야 한다는 말에 더 가깝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삶이 가진 우발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으며 그것이 욕망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어떤 욕망들을 완전히 말살시키고, 누군가의 욕망에 완전히 투항하라는 말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알 수 있다는 것은 좀 과장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니까...뭘 모를까? 자신의 욕망 말이다.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반드시 정치적인 것인데, 정치적으로 백치이므로, 좃도 욕망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야기가 샜다....    열받네.    좋다. 양보해서 탈정치적으로 생각해보는 거다. 당신이 켄 로치 영화를 보고도 아무런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가정하자. 참고로 나는 켄 로치 영화를 보면, 눈이 충혈되고, 몸에서 식은 땀이 마구 나며, 손발이 지 멋대로 움직이고, 체온이 70도 이상 올라가 헛소리를 중얼거린다. 심한 경우에는 귀에서 북치는 소리가 들리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당신이 켄 로치 영화를 보고도 위에 열거한 어떤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개뿔이나 정치적인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다. 불구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당신은 불구이고, 나는 어떤 종류의 클리닉이다. 사실 이 땅에는 정치적 불구를 위한 클리닉이 몹시 매우 많이 존재하고 있다. 조선일보나, 여타 신문들이 그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불구인 사람들이 매우 몹시 살기 좋은 나라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사회적 복지는 그...

증상, 억압,

* 증상은 억압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때문에 증상은 억압에 대한 거부와 승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진폭이며, 운동이다. 거부와 승인 사이의 진폭이 클수록 증상이 두드러진다고 하면, 증상의 크기는 진원지에서 멀수록 작아지고, 가까워질수록 커진다. 그러나 증상은 우리가 말하는 물리적, 공간적 시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시간과 논리적 거리를 따른다. 그렇다고 하면 증상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결과물이다. 또 그래서 증상이야말로 합리, 가 어떻게 해서 증상을 부추기는가를 보여준다.

이 바보

용기

* 나는 내 형제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숲을  먹고 자라나, 신성함이 교회에 있지 않음을 알고, 숲이 그늘을 내려놓지 않는 곳에는 어떤 신도 깃들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그의 잔혹함과 평화에 대한 믿음을 핏속에 품고 있으며, 또 우리는 그의 관대함 안에서만 자유롭다는, 단순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법보다 더 선하며, 어떤 정치적 입장보다 정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아무 연고도 없이, 우리는 도시로 올라와 숲처럼 울창한 골목들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의 비극과 난투극, 소란스러움, 탄식, 절망, 단순한 기쁨과 깊숙이 숨어 있는 증오들.... 내 환상은 그곳에서 완성되었다. 1465번지의 골목에는 세상 어느 곳보다 부드러운, 비가 내리는 밤이 있고, 여자들을 실어나르는 승합차들과, 견습 선반공들과 농구 코트, 검문과 어린 날치기들과 계단......    우리는 이곳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도 길고 긴 전쟁의 일부일 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나에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 뿐이다. 생각한 것보다 이 전쟁은 훨씬 더 긴 것이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늘조차 내려놓을 곳이 없는 이곳의 신에게라도 나는 기꺼이 무릎 꿇고 비나니,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다가오는 전투를 견뎌녈 인내를 주소서. 그리고 힘껏 축복해주소서. not enough!!            

이분법의 해부 / 불안의 탄생

* 이분법은, 고착된, 잘못된, 인과 관계의 전면화다. 적대적으로 보이는 이분법의 두 범주는 실은 같은 인과관계를 따르고 있으며, 그 인과를 생략함으로써 이분법은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면화된 이분법은 그 인과를 해명할수록 무력화된다. 말하지면, 이분법은 진짜 인과를 은폐하기 위한 가짜 적대, 가짜 전선의 전면화이다.    그래서 이분법이 보여주고자 하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의 공존, 그것으로부터 유발되는 불안과 위기감은 이분법이 감추고 있는 진짜 인과가 가지고 올 더 큰 공포, 더 큰 위기에 대한 방어다. 이를테면, 민주대 파쇼의 이분법은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혁명에 대해 품고 있는 위기감과 공포에 대한 방어다.   * 이와 같은 매커니즘은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성폭력 이후 피해자에게 나타나는 성적 욕망에 대한 강력한 억압과 동시에 강화되는 성욕은, 금지에 의해 더 강화되는 욕망의 매커니즘을 넘어, 불안을 조장한다. 실은 이 불안이야말로, 그가 선택하는 방어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이라는 쾌락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전적인 폭력, 무력감, 외상으로부터 주체가 성을 보호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이 금지-쾌락의 이분법을 통해 발생하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외상은 존재하지만, 그것에 대한 감각적 실존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그는 외상의 도래를 지연시킨다. 불안은 그가 외상의 도래에 대비해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과 감각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외상은 끊임없이 그의 현재에 도래하지만, 그는 자신의 기억, 감각의 왜곡, 은폐, 재구성을 통해 그 논리적 시간을 뒤트는 것이다.    그는 지금 여기 있지만, 그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된다. 자신의 좌표가 발각되는 순간 외상이 그를 거머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현존을 끊임없이 지연시키고, 그것을 위해 '외상'의 입장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의심함으로써, 외상으로부터 좀 더 효과적으로 ...

마초는 나빠

* 마초는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법이 없다. 마초는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 마초 나쁘다...나는 마초가 아닌 것 같다. 당신 대신 울고 있을 때.          

외상의 재구성

* 그렇다면, 외상에는 어떤 원형이 있을까?. 외상에는 오리지널이 없다. 외상은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텅 빈 기표다. 항구적으로 반복되는 고통이 있을 뿐. 외상은 증상을 통해 반복되는 어떤 오리지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복이 외상을 영원한 원형으로 오해하게 만들 뿐이다. 외상이, 어떤 자극을 통해 다시 언어라는 상징 질서의 궤도를 뚫고 언어의 질서를 부서뜨리며, 다시 등장할 때마다 외상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다른 증상을 옷입는다. 왜냐하면, 외상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상은 바로 그 재구성 그 자체이며, 어떤 경향이다. 물론, 그 재구성은 비언어적 재구성이다. 비언어적 재구성이라는 이 형용모순이 가능하다면....    외상을 언어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 생략되는 한, 외상은 언제든 돌출해, 상징 질서를 깨부순다. 외상은, 강력한 고통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또한 지금 주체가 몸담고 있는 상징 질서를 완전히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기존의 상징질서가 비언어적 외상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외상은 예외적, 비언어적 외상 자체를 기준으로 언어적, 상징적 질서를 완전히 재구성하려고 든다. 그런데, 외상이 돌출하는 뇌관은 반드시 언어적이다. 외상이 비언어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충동하는 원인이 비언어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인과관계는 비언어적이겠지만....    그러니까, 외상은 언어적 질서에 의해 돌출되는 비언어적 충동이다. 외상은 언어 질서 안으로 편입되지 못한 경험이다. 언어 질서로부터 배제된 경험. 그러니까, 외상이 돌출하는 통로는 욕망을 넘어서는 충동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충동이 언어적 질서를 넘어서는 인간의 실존적 차원을 보여주고, 그 비전을 넓혀주는 긍정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외상은 언어적 질서와의 공존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외상이 예외로써 구성하는 '전체'는 부조리하기 그지 없는, 인간으로써 견딜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