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와 소외
* 그러므로 소외는 '금지'안으로 편입하기 위한 절차라는 거다. 통과의례라는 말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금지라고 해서, 금기나 통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금지'는 타자가 이루어놓은 질서, 체계의 전체를 지칭하는 상징적 용어라고 해야 맞다. 타자의 질서 전체를 '금지'라는 말로 굳이 대표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금지가 미끄러지는 질서의 연쇄를 못박아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고정되지 못한 체계는 미끄러진다.
뭐 이를테면 '남자'라는 시니피앙이 지시하는 것이 고정돼 있지 않다고 가정해보자. '남자'가 다리미를 지시하거나, 남자가 벽돌을 뜻하거나, 고양이를 뜻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체계는 '의미화'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 의미화가 불가능하면? 자아의 생성 같은 일은 없는 거다. '의미'라는 건 별 것이 아니다. 자아는 저 질서, 그러니까 타자들의 체계에 편입되어 생기는 일종의 피드백과 같은 현상이다. 자아 역시 타자들의 체계에 소속되어 체계 전반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 받기도 한다. 요컨대,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만큼 이 '피드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반대로 감정의 탈락, 배제 만큼 이 '피드백'의 접촉불량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 저 질서의 체계 안으로 편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거나, 실패하였다면 어떤 전략을 선택하게 될까. 그 한가지는 자발적 소외이고, 그 두번째는 일종의 히스테리적 자아의 소환이다. 그 두가지는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뭐 사실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에서 당신이 저 질서의 체계 안에 초대받지 못했다면,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소외'의 절차를 다시 한번 거쳐 '질서' 안에 편입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저 '질서의 체계'-'금지'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일 것이다.
'소외'를 스스로 다시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자발적 소외'라면, 저 질서의 체계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히스테리..다. 자발적 소외는 자신의 미성숙한 '자아'를 배제함으로써 오디푸스 컴플렉스 안에 포함된 소외의 절차를 흉내내는 일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의심, 회의하고 이를 오로지 질서의 체계 안에서만 검증가능한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소통을 일방통행으로 만드는 것이 이 '자발적 소외'의 방식이기 쉽다. 그러므로, 자발적 소외의 주체는 질서의 체계를 향해 호소하는 일 없이, 저 질서의 체계가 자신에게 호소하는 일만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수동성'으로 무장한 주체다.
또 히스테리...는 ' 질서의 체계-금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단순히 더 강한 금지를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강화하는 것, 즉 타자의 욕망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타자에게 호소력있는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 히스테리 주체다. 결국, 히스테리 주체는 자발적 소외의 절차와 밀착해 있는 거다. 헥헥헥.
첨언하자면, 그러므로 히스테리증자에게 미끄러지는 언어들의 축제인 시는 아주 혐오-배제의 대상이면서, 또 한편 자신의 미끄러지기 쉬운 세계, 그 불안을 들여다보고, 대면하게 만드는 언어일지 모른다.
또 첨언하자면, 왜 자본주의적 주체, 혹은 근대적 주체가 자발적 소외와, 히스테리의 절차를 반복하는지 뭐 대략.
숨어 있고 싶고...
답글삭제숨어 있지만, 하지만, 내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뭐 이런 마음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거죠?
재미있어요....^^
근데 숨김이라는 말은 좀 해석의 여지가 많아요. 질서의 체계 안으로 편입함으로써 그 숨김은 완성되지요. 편입이 완료되면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요. 근데, 히스테리증자의 숨김은 저 질서의 체계 바깥으로 '나'를 배제시키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요.
답글삭제질서의 체계와 관계없는 '예외적 주체'를 완성시키는 것이죠. 근데, 모든 체계는 체계 내부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지만, 저는 체계에 결코 끝내 포함되지 못한 예외가 체계 전체를 가장 가감없이 정의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만약 저의 해석대로 '숨김'이 '예외적 주체'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예외적 주체야말로 그 체계의 성격과 질서를 완전히 재해석하는 존재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예외적 주체는 체계로의 편입에 실패하거나 혹은 그 접속이 불안정한 주체이기 때문에, 그는 체계 안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과 체계 바깥에서 예외자로써 체계을 완전히 다르게 정의내리고자 하는 욕망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숨고 싶지만', '자신의 숨어 있음을 알리고 싶다'는 말을 저는 위에 밝힌 두 가지 욕망으로 해석하고 싶네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두 가지 욕망 모두 '자발적 자기 소외'의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자기애' 없이는 예외적 주체도, 편입에 성공한 주체도 태어날 수 없어요.
그렇군요....
답글삭제음, 저는 자기애에 관한한 인내심이 1초 밖엔 안되는 것 같아요.
자기애의 출발, 부터가 자체 부정..^^
이러니 정말로 숨어 있을 수도 없죠. 발가락 하나쯤 반드시 세상의 바깥으로 삐죽...--;;;
근데 뭐 제 말도 다 의견에 지나지 않는지라...꼭 동의하실 필요는 없구요...
답글삭제사실 자기애라는 건, 타자를 통한 자기 동일시의 확인이라는 형태부터, 나르르르르르르시즘이라는 범주까지를 포함하는 말이 아닐까, 싶은데...
자기 동일시, 그러니까 내가 나로구나, 를 인정하는 게 중요한 거라기보다 이 나와 타자의 차이를 흔쾌히 긍정하느냐, 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는. 너는 왜 너 따위냐? 너는 너 따위야! 뭐 이런 것이 자기 동일시의 부정적 용례가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