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 바울은 나에게 교회를 통하거나, 성경을 통하거나, 혹은 역사적 기독교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예수에 이를 수 없다는 절망을 보여준다. 더 절망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이해하거나 믿고 있는 예수는 우리가 그에게 도달할 수 없는 절망 안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재차 확인해주는 존재에 가깝다. 신앙은 이처럼, 끝내 예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절망이, 우리가 그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기만적 가능성을 압도할 때에만 나에게 도래한다.

  바울은 꼭 예수가 고향에서 배척당했듯이, 유대인 공동체의 편협한(?) 신앙과 완고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집단 윤리를 포기하고 이를 로마의 종교, 보편의 신앙으로 전환시켰다. 보편성, 로고스...베버가 이성 종교라고 부른 기독교의 특징적 철학은 이 전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공관복음들이 오히려 바울의 서신들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들보다 역사적으로 후대 혹은 비슷한 시기에 기록, 편집되었다는 사실은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바울을 통해 예수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바울은 신앙이라는 것이 가지는 보편을 발굴해내기 위해서, 유대 공동체의 도덕으로부터 예수의 케리그마를 분리시켜 내었다. 그가 기독교 박해라는 퇴행적 정치를 거듭하던, 네로의 로마로 돌아간 것은 신앙인으로써의 결단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던 네로 이전의 로마, 시민적 공공성, 보편성으로써의 신앙을 승인하라는 요구로 작동했다....고 생각한다.

 

* 사실 신앙이란 것의 강력함, 밀도는 그 근거들의 허약함을 보완하려는 성질로부터 태어난다. 종교적 히스테리란 말은 그래서 신앙의 어떤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거다....

 

* 근데 사실 이미 바울 이전에 대대적인 이주 정책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가 지배하던 여기 저기로 많이들 옮겨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도들도 좀 예외적이긴 했지만, 종교적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받고 있었다. 그니까, 무슨 바울이 레지스탕스처럼 신앙공동체를 위해...머 이건 좀 과장이다. 네로가 등장하고 나서 최후의 순간에 목숨을 걸고 로마로....머 이건 거의 사실인 것 같지만..

 

* 글쓰기가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오히려 재현 아닐까. 재현이 이루어지는 순간 글쓰기는 멈추는 것이 아닐까. 재현 불가능성이 커질수록, 글쓰기가 활발해지는 게 아닐까.....마치 신앙처럼......

 

* 아무튼 나는 별 보고 싶은 책이 없을 때는 대개, 성경 비스무레한 것들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나한테는 신앙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자본주의적 욕망이 극단적으로 낮은 나 같은 사람은 히스테리나 강박증이 좀 필요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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