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의 재구성
* 그렇다면, 외상에는 어떤 원형이 있을까?. 외상에는 오리지널이 없다. 외상은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텅 빈 기표다. 항구적으로 반복되는 고통이 있을 뿐. 외상은 증상을 통해 반복되는 어떤 오리지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복이 외상을 영원한 원형으로 오해하게 만들 뿐이다. 외상이, 어떤 자극을 통해 다시 언어라는 상징 질서의 궤도를 뚫고 언어의 질서를 부서뜨리며, 다시 등장할 때마다 외상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며, 다른 증상을 옷입는다. 왜냐하면, 외상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상은 바로 그 재구성 그 자체이며, 어떤 경향이다. 물론, 그 재구성은 비언어적 재구성이다. 비언어적 재구성이라는 이 형용모순이 가능하다면....
외상을 언어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 생략되는 한, 외상은 언제든 돌출해, 상징 질서를 깨부순다. 외상은, 강력한 고통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또한 지금 주체가 몸담고 있는 상징 질서를 완전히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기존의 상징질서가 비언어적 외상을 자신의 질서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외상은 예외적, 비언어적 외상 자체를 기준으로 언어적, 상징적 질서를 완전히 재구성하려고 든다. 그런데, 외상이 돌출하는 뇌관은 반드시 언어적이다. 외상이 비언어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충동하는 원인이 비언어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인과관계는 비언어적이겠지만....
그러니까, 외상은 언어적 질서에 의해 돌출되는 비언어적 충동이다. 외상은 언어 질서 안으로 편입되지 못한 경험이다. 언어 질서로부터 배제된 경험. 그러니까, 외상이 돌출하는 통로는 욕망을 넘어서는 충동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충동이 언어적 질서를 넘어서는 인간의 실존적 차원을 보여주고, 그 비전을 넓혀주는 긍정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외상은 언어적 질서와의 공존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외상이 예외로써 구성하는 '전체'는 부조리하기 그지 없는, 인간으로써 견딜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상에 압도당한 주체에게 충동이란 결국 같은 것이다. 실존적 지평을 넓혀주는 충동과 언어적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려는 외상 사이에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을 넘어서는, 아니 고통을 관통하는 기쁨과 기쁨을 관통하는 고통...그 실존적 감각 사이에 차이가 없다. 아니, 외상에 압도당한 주체는 그 차이를 지우려고 한다. 차이야말로, 주체를 주체로 세우는 가장 큰 근거이기 때문이다.
외상에 압도당한 주체는 상징 질서 자체에 자신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주려고 한다. 왜? 외상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서....강력한 상징 질서가 외상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차이는 상징 질서 안에 완전히 매몰되고 싶은 주체를 자꾸만 주체로 불러낸다. 숲 속에 숨어 있는 나무를 숲 바깥으로 불러내, 외상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외상에 노출된 주체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기존의 상징 질서를 더 강력한 것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외상을 상징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고통스러운 길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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